[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강정 해군기지 공사장입구, 미사 시간에 의자를 들고 가서 앉으면 거대한 군사기지 공사현장을 목격할 수 있고 평화 지킴이들을 감시, 통제하는 경찰이 있습니다. 공사현장의 암반을 부수는 굉음과 현장을 드나드는 대형 트럭들은 소음과 먼지를 생산합니다. 이 상황에 미사 봉헌이 평온하려면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세상, 교회가 지향하는 세상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생각이 깊어지고 사색에 젖으면 공사장의 소음도, 먼지도, 경찰의 채증도 덤덤하게 받아 넘기게 되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전쟁을 위해 천문학적 예산을 퍼붓는 현실 앞에 국가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군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무력 앞에 평화와 생명, 인권의 우선을 말하기란 한없이 무력하고 내 자신이 한없이 왜소하고 초라하며 거대한 권력과 군과 자본의 연합에 평화는 하나의 신기루 같습니다. 그럼에도 평화지킴이들과 주민들과 연대하여 부당한 국가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고 저항하며 평화와 인권을 호소하고 부서진 생명을 일으킬 궁리를 하게 됨을 또한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이 땅에서 군의 힘으로, 군을 지배하는 세력들에게 과연 불가능함이 있을까요? 2015년의 국제사회는 이념 대립에서 화해와 실용을 향해 가는데 군사주의에 젖은 세력들은 합리적, 민주적 논리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오직 힘의 논리뿐입니다. 따라서 힘이 우선인 군에서 사고는 필연이며 그 내용은 당연히 힘의 논리가 모두를 지배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군 사고의 축소, 은폐의 원인 -  사단장, 군단장이 무한 권력

군에서는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축소, 은폐합니다. 최근 자주 일어나는 군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에서 확인됩니다. 군납 비리, 총기 사고, 자살, 폭력, 성 문제 등의 사고처리 과정과 수사 결과를 믿기 어렵고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축소하고 은폐할까요? 군 검찰이나 헌병은 사단장, 군단장의 수사 지휘를 받으므로 군에 불리하거나 인사에 영향을 미칠 사건은 축소, 은폐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단장과 군단장에게 모든 권한이 있어 그들은 무한권력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법원 또한 사단장, 군단장이 임명한 영관급 장교가 재판장이 됩니다. 이것은 사단장, 군단장이 재판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사단장, 군단장이 군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이 생길 것 같으면 언제라도 자신의 권한으로 헌병이나 군 검찰, 또는 재판에 개입하여 사건을 왜곡, 축소, 은폐할 수 있습니다. 인사권이 있는 사단장, 군단장의 축소, 은폐 지시를 헌병, 군 검찰, 재판부가 거절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요.

이처럼 군의 총체적 부조리가 안보를 빙자한 사업과 맞닿으면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닙니다. 이 폭발력이란 앞뒤 없이 거짓을 말하고, 군이 추진하는 사업은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왜곡된 신념입니다. 강정 해군기지는 추진 과정부터 이런 신념과 부조리가 꾸러미로 엮여 있습니다.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면 이처럼 군의 정체가 선명하게 보이고 군의 목적은 국토 방위보다 조직 확장에만 몰두하는 이익 집단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전, 현직 해군 참모총장이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현실이 그걸 증명합니다.

사진 출처 = EBS '지식채널e'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문득 안보를 앞세우는 저들이 2008년 7월 불온도서 딱지를 붙인 고 권정생 선생님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이 떠올랐습니다. 언제보아도 주옥같은 글들, 그분이 쓰신 전쟁에 대한 글이 여럿 있습니다.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라는 짧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 시절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쪽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평등한 동맹국이라면 절대 이럴 수는 없다. 약소국의 슬픔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의 이런 기막힌 관계를 모르고 있다.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하는지,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겪었던 혼란을 중심으로, 전쟁의 본질과 군은 전쟁을 하거나 전쟁을 준비하는 폭력 조직임을 짧은 글로 정확히 밝힙니 다. 그분의 정신이 무서워서, 그분의 글이 군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서 아마도 군은 자신의 정체가 들켰다고 생각하고 황급히 불온도서로 지정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글의 핵심은 진보나 보수보다 진실이 우선이고 이념보다 인간을 주목했습니다. 약자들의 운명을 주목했고 그들의 삶을 아파했고 국익보다 상처받은 약자가, 경제발전보다 약자들의 인간적 유대가 우선이었습니다. 그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를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꿈꾸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대가인 평화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을 거슬러 사셨던 그분은 실제 1년에 수천만 원이 되는 인세 수입에도 좁고 작은 시골집에서 청빈한 삶을 사셨고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는 문학상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않고 상패와 상금을 다시 돌려보낼 정도로 세속의 명예와 철저히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죽음 후 들어오는 통장의 수입은 모두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써 달라’, 그분의 유언입니다. 반공, 안보 이념을 강조하며 온갖 허위로 해군기지를 강행하고 정치 기반을 다지는 군과 정치 세력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세상을 거슬러 치열하게 사셨던 것입니다.

현재 군은 크고 작은 사고가 꾸준히 납니다. 매년 27만여 명의 청년이 입대하여 그중 150여 명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은 자녀를 끝내 주검으로 돌려받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가족의 슬픔만 허공에 남고 150여 명의 청년들은 전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며 죽어 가는 생명입니다. 닷새에 2명의 청년이 군에서 죽어서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황망한 현실입니다. 병영에서 그분의 글을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분의 글을 읽고, 그분의 삶을 보았다면 서로 죽이고 짓밟는 행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인간의 품위를 읽었다면 군납 비리는 없었을 것이고 작품에 흐르는 평화에 대한 염원을 읽었다면 저 무모한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의 글 앞에 벌벌 떨며 군인들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국방부의 눈물겨운 노력이 가련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국방부는 각성하고 불온도서로 낙인찍은 책들을 병영에서 읽게 하라!’ 해군기지 앞에서의 상념입니다. 아! 오늘은 권정생 선생님과 함께 기지공사장 앞을 지킨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변함없이 경찰 지휘관의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형법 314조, 업무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동하지 않으면 형사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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