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에서 안보 관련 사업을 반대하고 군을 확장하는 일에 반대하면 많은 이가 매우 우려합니다. 특히 한국전쟁 중 가족을 잃은 사람들, 북쪽 군대에게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보사업을 반대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매우 강합니다. 가족을 잃고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전쟁 피해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해서라도 북쪽을 무찔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전쟁을 위해 늘 무장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전쟁은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평화를 위협하고 생명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불가피한 전쟁, 더 큰 악을 막기 위한 전쟁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전쟁의 결과는 생명의 죽음이요 평화의 상실입니다. 그리고 실제 불가피한 전쟁은 거의 없습니다. 역사 속의 거의 모든 전쟁은 더 큰 악을 막는다는 핑계로 시작했지만 실제는 그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돌아보면 1,2차 세계 대전은 끊임없는 자본주의의 확장이었습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가장 최근의 이스라엘 가자지구 싸움도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의 확대 과정이었습니다. 전쟁은 곧 무기 장사였고 식민지를 확보하며 식민지에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즉 자본에 의해 생산된 제품의 판로를 확보하려고 식민지 경영을 확대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의 본질, 군수 회사 배 불리기

전쟁은 의로움을 포장한 무기 시장의 확대였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군수 회사들의 이윤 극대화 그 자체였습니다. 전쟁은 그들의 배를 불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땅에서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변방의 약한 나라를 찾아 싸움을 부추기면서 평화를 위협하고 수많은 생명을 살상하면서 이윤을 챙겨 나가는 이런 현실 앞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미국을 중심에 두고 있는 자본주의는 군사주의와 결합하여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태평양 연안을 휘젓고 다니고 있습니다. 무자비하게 생명을 살상하고 안보를 가장하여 세계평화를 위협합니다. 냉전시대의 언어로 정쟁을 부추기고 안보를 빙자하여 적개심을 유발합니다. 위험을 과장되게 선전하고 세상을 냉전의 싸움터로 유지하려 합니다. 생명을 학살하고, 침묵을 강요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보를 빙자한 무기 장사의 정체이며 강정 해군기지가 그렇습니다.

제주 강정에서는 8년째 해군기지 건설이 한창입니다. 나라를 지키려면 안보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군비 증강에 한창입니다. 이것은 안보 사업이 아니라 개발 사업일 뿐이며 무기 시장의 확대입니다. 안보란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안보란 백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 같은 이념입니다. 그런데 강정 해군기지는 안보란 이름으로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재산권만이 아니라 환경권도 빼앗고 온갖 권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보전된 온 세상 사람들의 재산이며 천연기념물인 강정 앞바다의 연산호 군락과 구럼비 바위를 무참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 9월 27일 진행된 강정 평화대행진.ⓒ정현진 기자

단순히 환경에 미치는 영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시각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연산호 군락은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그분이 은밀히 즐겨 찾던 그분의 뜨락입니다. 주민들은 연산호 군락과 함께 긴 세월의 상처와 삶의 고단함을 달랬고 마음의 아픔을 녹여 왔습니다. 그러나 해군기지 건설로 하느님의 뜨락은 심한 몸살을 앓아 왔으며, 그것은 더 이상 주민들의 고단함을 달랠 곳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하느님께서 쉬어 가는 뜨락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사 반대'에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해군기지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다는 말입니다. 이미 해군기지는 주민의 반대와 상관없이 공사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민들은 해군기지 공사가 계속될 때 정말 죽을 것 같습니까? 결사 반대라고 하지만 주민들은 결사(決死), 죽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말을 들어 보라고 하소연 하는 것입니다. 온갖 수단을 다 써도 말을 들어 주지 않으니 ‘결사 반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잃고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전쟁 피해자들이 ‘군사무장을 주장’함이 이해되는 것처럼 ‘결사 반대’를 외치는 주민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생명과 평화를 우선합니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군사적 긴장과 핵전쟁의 위협을 증가시키고 평화를 위협하는 해군기지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3년 전 제주교구와 전국 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 그리고 남녀 수도자연합회 등이 ‘연대활동’을 시작했고 생명평화의 사목을 더욱 구체화하고 현장감 있는 활동으로 한 차원 끌어올리기 위해 ‘생명평화 사목센터’를 세우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이 센터는 주민들의 ‘결사 반대’라는 주장에 담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돕겠다는 의지입니다. 센터는 그래서 그 자체로 ‘죽기를 각오하고 살겠다’는 적극적 생명 의지이며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선물해 주신 평화가 사라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다면 그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생명이 무너져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그분에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드디어 지난 9월 29일, 제주 강정에서 ‘제주평화의섬 실현을위한 천주교연대’ 3주년 미사와 ‘강정 생명평화사목센터와 강정공소’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해군기지에 비하면 230평의 사목센터는 ‘새 발의 피’이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입니다. 그저 한 점(點)을 찍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정말 그저 아주 작은 기도입니다. 무력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호소이며 탄원이고 절규이며 복음을 살아가는 가장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뜨락이 사라지는 것을 진정 보고만 있을 수 없잖습니까? 이 땅을 저 중동지역처럼 전 세계의 강대국들이 냉전 싸움터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모든 생명은 다 존엄하다는 것이 창조정신이며 전쟁은 문명의 종말입니다. 강정 앞바다에서 하느님의 뜨락이 없어져서 더 이상 하느님께서 찾아오시지 않는다면, 주민들의 아픔을 씻어 주던 아름다운 연산호 군락과 붉은말 말똥개가 없어진다면, 장마철 어둔 밤을 노래로 지켜 주던 맹꽁이가 사라진다면 인간들 끼리만 홀로 외로워 어떻게 살 것입니까? 인간은 배고파서 죽기도 하지만 외로워도 죽는 것 아니던가요?

기공식이 시작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처도, 미움도,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빗물, 아! 하느님의 눈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신다면 군사주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강정 마을 하늘이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슬픔을 떨치고 기쁨을 찾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찾아 나갈 것입니다. 그분께서 더 이상 눈물을 흘리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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