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출가와 더불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면서 살아 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분골쇄신(粉骨碎身)하겠다며 봇짐을 메고 출가할 때의 총기와 패기는 간데없고 몸뚱이 하나가 변하기란 저 산을 옮기는 것보다 어렵다는 생각에 이르니 이 가을이 더 처연하기만 합니다. 아니 가을이 처연한 것이 아니라 제 신세가 처연하고 측은하다는 생각에 우울해 집니다.

돌아보면, ‘삶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고 출구가 보이지 않던 시절,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이란 무엇인가? ‘이타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고민 많던 풋사과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은 벅찬 환희였고, 어떤 생각은 가슴 깊은 곳이 칼에 찔리듯 통증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은 허무였고, 어느 순간은 신앙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으로 출가했으나 그 충만함은 사라지고 휘청거리며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참 염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분 덕분에 밥은 먹고 살고 있으니 그분은 참 아량이 넓으신 분입니다. 새삼스러운 늦가을의 배움입니다.

위령의 달이 시작되는 1일, 토요일 아침, 수도원 본부에 잔치가 있어서 가는 길에 집어든 조간신문에는 다음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나를 거둔 분, 고맙다…국밥 한 그릇 하시라.” 불편한 제목이라 내용은 외면했습니다. 다른 큼직한 기사들을 먼저 읽고 돌아오는 길에 읽으려는 속셈으로 서둘러 신문을 가방에 넣었습니다.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국밥 한 그릇’이라는 제목이 문득 문득 저를 자극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 과 비슷한가?” 하는 생각에 궁금증은 더 컸던 것입니다. 서둘러 잔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신문을 다시 펼쳤습니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혼자 세 들어 살던 60대 최 씨가 3개월 전 모시던 노모가 세상을 뜨자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자신의 장례비와 함께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비용으로 추정되는 176만 원을 남겨놓고 목숨을 끊은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사람에게 다음처럼 미리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고맙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라. 개의치 말고....” 글을 읽는 순간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예의를 갖춘 것은 전기, 수도요금 고지서와 그 만큼의 돈을 새 돈으로 구해서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 예의, 사람을 향한 진실함에, 세상을 향한 태도에 가슴이 아렸습니다.

선한 심성으로는 버틸 수 없는 세상

그는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지만 분명히 선한 심성으로 세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선한 심성의 사람이 버틸 수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한 사람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죽었음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그에 의해 우리 사회가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라고 판정받은 것입니다. 최 씨는 우리가 짐승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짐승은 옆에 누가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 그렇다면 저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란 말인가요? 문득 여름에 다녀가셨던 그 어르신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이든 노숙자의 죽음은 뉴스가 되지 않으면서,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2포인트 하락한 것은 뉴스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 사진=ytnnews24 유투브 갈무리

“모시고 살던 노모가 눈을 감고 전셋집이 팔려서 갈 곳이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다”고 보도되었는데, 그는 노모가 혼가 가는 길이 외로울 까봐 따라 나섰단 말인가?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았는데 문상은 누가? 세상에 살면서 그는 어떤 기쁨을 맛보았을까? 친구는 얼마나 있을까? 공사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죽음을 알고 있을까? 그의 사무치는 외로움의 깊이는? 며칠이나 불면의 밤을 보내며 마음을 결정했을까? 칠흑 같은 밤을 뜬눈으로 며칠을 지냈을까? 죽기 전에 누가 가장 보고 싶었을까? 죽기 전 무너져 내리는 가슴의 슬픔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그의 마지막 숨 가쁜 호흡은? 아니 얼마나 더, 잘 살고 싶었을까? 그는 국밥과 어떤 인연을 맺고 살았단 말인가? 국밥 한 그릇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고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아! 스승이신 예수께서 세상을 하직하기 전날 밤, 하염없는 고뇌의 깊이에 눌려 흘리신 피땀과 최 씨가 깊은 밤 혼자서 흘린 눈물은 같은 무게였을까요? 스승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마디로 부르짖은 절규와 최 씨가 혼자서 흐느낀 울음은 맞닿았을까?

아! 나는 이렇게 국밥 한 그릇 만큼의 예의를 갖추고 죽을 수 있는가? 나에게 그 순간이 온다면 외로움과 슬픔을 의연하게 정리하며 고맙다고 인사할 수 있을까? 허겁지겁 살다가, 급기야 먹은 것 모두 토해내고 일순간에 황천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가 세례 받은 신자였다면 교회는 뭐라고 할 것인가? 자살했다고 장례미사를 못하게 하며 성당에서 내치는 것은 아닐까? 과연 그를 두고 누가 자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목숨의 생과 사를 스스로 선택하는 이런 죽음에 대하여 교회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과연 그는 생과 사를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던 것 아닌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교회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비난하진 않을까? 현실의 교회는 이런 죽음이 존재하는 사회와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 세상은, 교회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 저는 이렇게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하늘이 그와 노모에게 따뜻하고 바람이 잘 통하고 포근한 양지바른 곳을 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되면 고요한 달빛 그림자가 그를 다정하게 비추는 자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날, 그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죽음을 결행했을 밤이 더 이상 외로운 밤이 아니라 당신 품에 안기는 환희의 밤으로 영원히 기억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가 생명을 경시했다고 그를 단죄하더라도 부디 당신만은 예의 바른 그의 영혼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같은 쓸쓸한 가을, 그가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되어 국밥 한 그릇에 시름을 달래야만 하는 우리 세상의 수많은 최 씨 들을 다독거려 주면서 위로하고 하나가 되는 영원한 동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부탁이 진정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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