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겨울의 길목, 얼마 전이었습니다. 공동체 형제들과 완도에서 제주행 배에 몸을 실으려고 승합차를 몰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창밖은 초겨울의 추위로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시골길 버스 정류소에는 80살은 충분히 되어 보이는 어떤 할머니 한분이 버스를 기다리는 듯 보였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백미러에 보이는 할머니는 태워주기를 원하는 눈치였습니다. 차량을 후진하여 할머니를 태웠습니다.

“어디까지 가세요?” “읍내까지 태워주소.” “날씨가 차가운 데 버스를 오래 기다리셨나 봐요?” “차 시간을 몰라 부러서” “어휴, 차가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닌데, 시간 맞춰서 나오시지 그랬어요” “....”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순간 할머니가 흐느끼고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차 시간도 몰러. 맨날 태워다주고 그랬는디.... 한 달 전에 멀리 가 부렀어” 떨리고 가는 목소리가 숨죽이듯 가파르게 작아졌습니다.

평생을 함께 해 왔던 할아버지가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가시기 전에는 읍내에 다닐 때 항상 태우고 다녀서 버스 값도, 버스 시간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떠나니 혼자서 추운 겨울에 읍내를 다녀와야 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나와서 버스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몇 차례 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길 공영버스를 말입니다.

“자녀들은 없나요?” “다들 광주허고 서울에 나가 살고 있소” “혼자 계시니 고생이 많겠군요?” “농촌이 다 고생이랑께. 농촌이 불쌍허지. 비료 값, 농약 값은 두 배, 세 배로 올라 부렀는디, 쌀 한말 값은 10년 전과 똑 같어 붕께로. 농민만 불쌍 허당께.”

호남 사투리와 서울 사투리가 섞인 말로 한탄하던 할머니는 읍내에 도착하자 연신 굽실거리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차에서 내려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할머니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짧은 정적으로 할머니의 흐느낌을 지켜보았던 요한 형제와 베드로 형제가 동시에 뱉은 말이 “아! 짠허네”입니다. 두 형제는 할머니의 상황에 무척이나 공감했었던 것입니다.

▲ 추수가 끝난 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죽은 정승보다 산 머슴이 낫다는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조류나 포유류 새끼들은 어미와 떨어지면 울지만 어미가 돌아오거나 먹이를 주면 거의가 울음을 그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울음은 어미와 떨어지는 문제나 먹이만의 문제 가 아닙니다. 사람의 울음은 혼자 있을 때나 아는 사람을 여럿 만나거나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함께 운 사람은 서로의 공감으로 친밀감이 배가 되기도 하고 관계의 깊이를 더해 주며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나 각도가 증가 합니다.

볼테르는 ‘눈물은 목소리가 없는 슬픔의 언어’라고 했었지요. 사실 할머니의 눈물은 마음 놓고 큰 목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우리 시대와 역사 속의 수많은 약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아니 시대를 넘어 할머니가 살아온 지난 80여 년과 현재와 미래입니다. 우리들의 역사 속 깊이 스며있는 생채기이며 미래 진행형인 슬픔의 언어입니다.

할머니의 눈물에서 주권을 빼앗긴 일제 강점기, 민족 말살과 수탈의 상처를 봅니다. ‘비료 값, 농약 값 다 올랐으나 쌀값은 10년 전과 똑 같다’는 할머니의 말에서 일제가 전시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강제로 시행했던 공출제도를 봅니다. 할머니의 주름에서 60여 년 전 우리나라 옥토를 두 동강으로 분열되게 만든 소련과 미국, 김일성, 이승만의 만행을 보며 전쟁으로 수백만의 목숨을 빼앗고 통한의 휴전선과 잿더미만 남긴 채 현재까지 아무 말이 없는 조국을 봅니다. 할머니의 한탄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5.16을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5년 전,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광주항쟁, 그리고 미완의 혁명을 봅니다.

할머니의 눈물은 ‘삼척간첩단사건’으로 8명의 일가족이 ‘고정간첩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35년간 흘린 통한의 눈물입니다. 해군기지가 건설되는 제주 강정 주민들이 삶을 빼앗긴 슬픔의 눈물입니다. 2015년 강정 해군기지 예산, 2980억 원이 국회를 통과하는 날,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흘린 좌절의 눈물입니다. 4대강 사업이 공사비 낭비와 총체적 부실을 안고 끝날 때 멸종위기 1급의 미호종개, 멸종위기 2급의 묵납자루, 꾸꾸리 등이 신음하며 쓰러져 가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뉴욕 발 대한항공 1등석에 타고 있던 조현아 앞에 무릎 꿇은 박창진 사무장과 여성 승무원이 감내하는 모욕감과 굴욕의 눈물입니다. 조현아가 국토부에 조사받으러 출두할 때 멀쩡한 국토부 화장실을 다시 점검해야 했던 화장실 청소 담당 여사님의 허탈한 감정, 바로 그것입니다. 아주 작은 지분으로 기업의 주인처럼 행세하는 비상식적 자본주의 지배구조에서 머슴이라는 봉건사회의 멍에를 메고 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숙명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철탑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케이블방송 씨앤앰 해고자 강성덕, 임정균은 30미터 높이의 광고판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며 눈물을 훔치는 것이며 코오롱 자본의 근거 없는 경영상의 위기로 인해 해고된 노동자들의 10년의 절규가 있는 것입니다. 이 겨울에 평택공장 내 70미터 높이의 굴뚝 위에 올라가 살기위해 목숨을 걸어야하는 기막힌 현실에서 고공농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쌍용자동차 노동자 이창근, 김정욱의 눈물도 결국은 봉건사회 같은 모순된 기업 지배구조의 한 측면입니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4월 16일, 세월호 침몰의 진실, 그리고 허공의 꽃이 되어버린 아이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8개의 별-. 할머니의 눈물은 이 진실을 향한 시선입니다. 아! 그날, 2014년 10월 23일 워싱턴에서 나라의 주권을 줘 버린 날, 군사 주권을 넘겨버린 순간, 오욕의 눈물, 상대가 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구걸하면서 건네 줘 버린 때 할머니의 눈물은 곧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득 ‘한 달 전에 멀리 가부렀소’하는 할머니의 말처럼 할아버지가 가신 날이 바로 이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사람의 울음은, 눈물은 공감할 때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몸짓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미 없이, 혹은 의미가 넘치게 몸짓을 합니다. 그 몸짓이 더 깊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즉 한 ‘사람의 몸짓이 무엇과 관계 맺고 어떻게 공감하는 몸짓’이냐에 따라서 그 몸짓은 개인과 우리 안에 ‘관계’로 살아남아 역사가 되고 부활이 되고 영성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할머니의 눈물은 그분, 주님 육화(incarnatio)의 몸짓입니다. 아! 할머니의 눈물은 그분, 주님께서 우리의 역사를, 우리 시대를 공감하며 흘린,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몸짓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 스승님의 부활이며 엠마오의 만남이었습니다. 알파요 오메가인 그분께서 우리를 불러 세워 동승하신 것입니다. 10분여의 동승, 민족의 역사 안에 살아계신 임마누엘, 우리가 그분을 모신 것입니다.

때 이른 감격의 성탄 선물이었습니다. 허나, 세상은 아직도 엄동설한으로 얼어붙어 울부짖는데 저만 그분을 만났다고 철없이 기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잿빛 세상에 울부짖는 이웃이 많은데....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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