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성탄 축일에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은 이 세상에 오신 그 생명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 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記事)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말은, 하느님에 대해 알려 줄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외면하였고, 먼 이역(異域)에서 사람들이 찾아 와 그분을 영접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활동하였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박사라는 사람들이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 하는 사람인지, 몇 명이며 어디서 왔는지, 베들레헴에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등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할 것 중, 어느 하나도 복음서는 정확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박사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나서 배역을 마치고 사라지는 배우와 같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물이 셋이라서, 기원 후 500년경에 발생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자, 즉시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들레헴에서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 주어졌지만, 길을 묻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말씀을 만난다고 말하려는 마태오 복음서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 별의 인도를 받는 동방박사. 귀스타브 도레(1832-1883)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모두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길을 갑니다. 돈과 권력을 좇아, 어떤 때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고 행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외면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 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 곧 그분의 생명과 연대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진흙, 곧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시게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여정(旅程)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 흔한 별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고, 회의(懷疑)에 빠져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이 준비한 정성을 바치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고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좇아 떠나겠다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지위가 꾸며 주는 온상에는 하느님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나은 지위를 얻어, 우월감을 가지고 살겠다는 마음에는 말씀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온상을 떠나서 만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길을 가는 우리가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약한 이웃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한 사람들이 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에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보살핌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우리의 보살핌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기심과 헛된 망상(妄想)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하고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율사들 같이, 오늘의 종교 혹은 정치 지도자들이 하는 엉뚱한 주문이나,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맺힌 외침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그 삶의 숨결로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 사는 이기심과 무관심의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필 때,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말씀과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 우리 삶의 기원이십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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