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19]

메리와 욜라는 내가 낳은 아이들이지만 도저히 내 것이 아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과학적으로 내 유전자의 반을 가지고 있으니 안팎으로 나와 닮은 점이 많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도 두 아이는 나에게 언제나 낯선 친구로, 그것도 이제껏 만난 적이 없는 새로움 가득한 친구이다. 그 중에서도 욜라는 좀 많은 아량이 필요하다 못해 종종 ‘이해하려하지 말자, 그냥 미친*거라 여겨야지. 아니면 아주 바보거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주위에 더러 존재하지만 또 그렇게 쉽게 만나볼 수 있는 흔한 친구는 아니다.
*주) 여기서 ‘미친’(혹은 ‘외계인’으로 대체될 수 있음)이라는 수식은 주로 다섯 살 미만 아들을 둔 엄마들이 도달하는 결론이자 위로로 엄마로서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서도 아들에 대한 경악과 혐오를 잠시 멈추게 하는 마술 같은 경구이기도 하다.

설마 했는데

▲ 성내고 마당으로 가출한 질풍노도 소녀 메리.ⓒ김혜율
일 년 전 쯤 개인적 취향을 좀 가다듬어 볼 요량으로 도자기를 구경하러 다니다 어느 도자기소품가게 주인이 쓰면 쓸수록 ‘작품’을 대한다는 것이 느껴질 것이라고 강추 하는 바람에 샀던 붉은 태양빛 머그컵 2개가 어제부로 우리 집 선반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짙은 검붉은 몸체의 빛깔에 무엇을 담아 먹어도 묵직한 무게감으로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아 이건 작품이야....’ 하는 감상도 채 느껴 보지 못한, 아직은 더 두고 봄직한 컵이었는데, 이제 다시 볼 수가 없게 됐다. 던지면 깨지는 거 아는데 설마 던지겠어....? 욜라야, 난 널 믿어. 하고 짧은 순간 간절히 기원했지만 성이 난 욜라는 마침 제 손에 들려 있던 컵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던졌고, 컵은 허망하게 깨지고 말았다. 만약에 욜라가 우리 집 마당 진흙탕 위에 서 있었다면 그대로 그 위에 엎어지는 쇼를 했을 것이다. 넘어지면 옷이 젖어 축축하고 이래저래 저도 기분 상할 텐데 설마 일부러 넘어지기까지 하겠어? 욜라야, 그러진 않을 거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진흙목욕이라도 하는 아기돼지마냥 넘어지고 또 한 번 더 넘어지고 내가 뭐라고 할까봐 지레 울고불고 난리법석이 날 거다. 오죽하면 생후 9개월 때 남편이 지어 준 호가 ‘오노’일까. 2002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우리나라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을 가로챘던 미국 선수 ‘오노’는 저리가라다. 그 당시 욜라는 넘어졌는데 얼른 달려와서 일으켜 주지 않으면 한 번 더 넘어지는 슬랩스틱을 구사하고, 부스터라는 아기 식탁 의자에 앉혀 이유식 먹일라치면 왜 여길 날 가두냐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다가 무게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해서 부스터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워낙 메리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터라 상대적으로 욜라는 ‘그나마 순둥이’라고 넘어가고 웃곤 했지만, 욜라가 걷기시작하고 난 뒤에는 누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막상막하’고 ‘난형난제’요 ‘오십보백보’가 되었다. 메리가 호랑이띠이고 욜라가 용띠라 남편과 나는 그것을 간단히 ‘용호상박이군.’ 하고 만다.

그래도 누나와 달리 참으로 과묵하였던 아이,(물론 할 줄 아는 말이 별로 없어서) 욜라는 두 돌 생일을 기점으로 한 달 여 사이에 말문이 빵 터졌다. 명사, 동사, 형용사 외에도 풍부한 부사, 정확한 조사 사용 등 문장의 9품사를 구사하는데 그 수준이 상당하다.

▲ 들깨 터는 메리와 욜라.ⓒ김혜율

하던 일이 바빠 자기한테 눈길을 주지 않고 건성으로 ‘응~ 그랬어?’ 하고 대답하면 욜라는 말하다 말고 잠시 침묵하는 수를 두다가, 휴.... 하는 한숨과 함께

“엄마, 내 말 좀 들어봐 봐.” 하며 착찹한 얼굴로 목소리를 깐다.

메리가 20개월 되기도 전에 밤하늘의 반달을 올려다보며 ‘엄마, 오늘은 달이 부서졌어’, 또 별들을 보며 ‘엄마, 하늘에 별이 수박씨 같아’라고 했던 시적인 표현과는 격이 다르지만, 욜라는 욜라 나름대로 토크쇼에 나간다 해도 할 말이 제법 있을 것 같다. 토크쇼의 주제는 ‘엄마와의 협상테이블에서 항상 승리하는 법’이나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깽판짓의 이모저모’나 ‘두 살 터울 누나에 대한 하극상의 전모, 잔머리 굴리는 법’ 같은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리고 요즘 욜라는 피똥 싸는 걸 멈춘 후로는 살이 투실투실 올라 도톰한 내복과 외출복을 입혀 놓으면 데굴데굴 굴러가는 곰돌이 같고, 얼굴은 볼살이 빵빵해서 코가 다 묻힐 것 같아 남편은 이런 욜라를 보고 문득 초코홈런볼이라는 과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은 이미 날이 어두워져 날 밝은 다음날 사 먹자고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욜라 얼굴은 또 난데없이 감자만두였다. 그렇다고 감자만두나 감자떡을 사 먹은 건 아니고 홈런볼도 안 사먹고 넘어갔지만, 욜라의 포동포동한 얼굴은 언제나 부푼 밀가루 반죽이 모락모락 익어가는 것처럼 이것저것 맛있는 것이 생각나게 한다.

어린이집에 보내려니 마음에 걸리는 것

▲ 크리스마스트리와 욜라.ⓒ김혜율
이렇게 욜라 때문에 많이 울기도하고 웃기도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니, 다름 아닌 내년 3월에 태어날 예정인 욜라 동생이다. 용호상박하는 와중에서 신생아를 돌봐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져서 내년엔 욜라도 서너 시간만이라도 어린이집을 보내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어디든 엄마 아빠를 데구루루 따라다니는 천둥벌거숭이 욜라를 데리고 옆 마을에 딱 하나, 기적처럼 존재하는 어린이집을 방문했다. 제법 큰 3층짜리 건물로 인근 시내에서도 아이를 믿고 보내는 국공립 어린이집으로 듣는 족족 언제나 평이 좋았다. 나에겐 무엇보다 집 앞까지 버스가 온다는 환상적인 셔틀버스 운행과 욜라가 점심밥만 먹고 들어와도 내 수고가 얼마나 덜어지냐 하는 상상만으로 가슴이 뛰었는데, 실제로 둘러보고 와서는 마음이 영 신이 나지 않는다. 그 어린이집에서 특별한 하자를 발견한 건 아니다. 예전에 메리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둘러보았던 여러 어린이집들에 비하면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집 보다는 좋지 않을 테지. 노랑반, 초록반 같은 이름의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린 아가들한테선 엄마하고만 지내는 아기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경계심 없이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거리낄 것 없이 기고만장한 천진함이 안 보이는데 어쩌면 좋지? 점심 먹고 일률적으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낮잠을 자거나 잠이 안 오면 그냥 누워서 눈만 꿈뻑이는 아가들이 마냥 가엽고 쓸쓸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그 시간에 달콤한 자유의 해방감을 맛본들? 이 세상 많은 아이들이 별 일 아닌 것처럼 사회성? 기르랴, 똑똑(?)해지랴, 엄마 자유시간 확보하랴, 엄마 일하랴 해서 당연히 가는 어린이집인데, 왜 나만 ‘이건 아닌데.... 애들이 걱정이야.’ 하는 건지.... 정말 육아를 도와주는 지인이 가까이에 아무도 없고, 맘 털어 놓을 또래 육아 친구도 없는 시골 깡촌에서 두 살, 세 살 터울, 그것도 말 지독히도 안 듣는 큰 아이 둘과 밤낮 앵앵 거리는 갓난쟁이 애를 어찌 내 힘만으로 키울지 아무런 자신도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욜라를 어린이집에 맡기지 않고 셋째와 함께 집에서 지내며, 또 일찌감치 집에 들어오는 여섯 살 된 첫째-여전히 사춘기적 질풍노도중인-아이와 함께 집에서 낑낑 댄다면 아마도 친정이고 시댁이고 옆집이고 간에 만나는 어른들마다 애 어린이집에 보내지 뭐하고 있는 거냐고 날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른다.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미련하다고 흉볼지도 모르고. 결국은 그 누구도 아닌 엄마인 내가 키울 텐데(사실은 아이들과 사귀는 것, 내가 아이들을 알아가는 것이지만)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거다. 근데 애 셋 돌보기, 정말 힘 드는 상상이다. 욜라는 과연 어째야 할까? 내년 1월부터 어린이집에 적응시켜보리라 했던 계획은 인어공주의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남겨진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의 희생(?), 축복(?)으로 그 후로 잘 먹고 잘 살았더라고 이야기가 끝이 났던가. 아아, 제발! 육아라는 전쟁에서 내가 쏜 총에 내가 죽는 것만 아니면 좋으련만!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두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3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