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교종은 알고 계셨던 겁니다. 지치고 상한 이 땅의 영혼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위로와 공감이었다는 것을. 그토록 간절히 원했으나 그 어느 ‘지도자’도 건네주지 않았던 따뜻한 눈길과 마주 잡을 손을 그는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바티칸으로 돌아간 지 열흘이 넘었지만, 꿈인 듯 포근했던 그 순간들에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유민 아빠의 절규가 마침내 화답 받고, 성호 엄마가 잃었던 웃음을 되찾고, 그 잔인한 세월 잃지 않고 지켜 왔던 위안부 할머님들의 고귀한 인격이 존중 받고, 외로웠던 우리 강정 활동가들, 밀양 할매들, 용산 참사 유족들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아픔이 어루만져졌던 그 짧은 순간들이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일상은 비참합니다. 맘몬의 신하들이 하늘과 땅을 장악하여 살아 있는 것들의 생기를 다 빼앗는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오래된 시가 떠오릅니다.

“(…)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잔치는 끝났습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부르다 만 노래의 의미를 새기고 새롭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아야 할 때입니다. 아직 들떠 있는, 꿈꾸고 있는, 혹은 깊은 상실감과 슬픔에 빠져 있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마음과 행동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에 4박 5일 교종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 8월18일 명동성당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참석한 위안부 할머니 ⓒ교황방한위원회

가난한 몸과 가난한 마음

‘가난.’ 교종이 4박 5일 내내 강조한 메시지입니다. 그는 “막대한 부요 곁에서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있다”고 우려했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선포했으며, “부유한 이들의 교회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경고했고,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울 것”을 권했습니다. 교종이 강조한 가난은 물론 일차적으로 물질적 가난입니다. 벤츠를 타고 펜트하우스에 살면서 가난을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빈의 자리에 머무르기보다 우리 사회 가장 힘없는 이웃들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낮춘, 아무런 포장도 가식도 없이 그저 고통이 있는 곳으로 마음을 흐르게 한 교종의 모습은 물질적 부요를 포기하는 것 이상의 가난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마음의 가난”이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오 복음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예수의 첫 번째 행복선언입니다(마태 5,3 공동번역). 그런데 이 구절은 사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흔히들, “몸은 가난해도 마음만 부자면 돼”, “마음의 풍요는 돈보다 값진 거야” 라고 말하곤 하지요. 예수가 그리 말씀하셨으니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분명 칭찬이고 축복일 텐데, 축복의 의미로 사용하기에는 왠지 어색합니다. 우리들 머릿속에는 이미 부유하고 풍요로운 것이 가난한 것 보다 좋은 것이라는 잣대가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만이라도 부자가 되어야지요. 그런데 예수는 마음 또한 가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선 이 혼란은 공동 번역의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니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프토코이(πτωχοὶ )”는 가난하되 구걸을 해야 살 수 있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을 말합니다. “프뉴마(πνεύματι )”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에서 온 단어인데, 직역을 하자면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지만 ‘하느님의 숨’, ‘성령’, ‘심령’, ‘인간의 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여기서 가난을 인간 내면의 가난으로 이해하여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곧 “겸손한 사람”이라 가르칩니다. 겸손은 결국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니 이 또한 좋은 해석입니다만, 어쩐지 예수가 말한 구걸을 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가난의 의미를 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는 제 방식대로 좀 더 풀어서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이란 “영, 즉 하느님의 숨과 기운을 늘 구걸하는 사람들”이라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적인 가난”으로 가난이 추상화, 내면화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곤고한 마음이나 절박한 심리적 상태가 좀 더 부각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발적 가난이지, 강요된 가난이 아니라고, 강요된 가난은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하지요. 물론 맞는 말입니다만, 그렇다면 또 질문이 생깁니다. 가난의 영성은 부자들만 추구해야 하고, 실제 가난한 사람들은 배불리게 될 날들을 오매불망 바라며 살아도 좋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우리 모두 다 같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일까요?

말이 가난이지, 가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기초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방문을 청테이프로 막고 번개탄을 태운 채 세 모녀가 자살해야 하는 삶은 바람직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라 해서 그들의 모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은 어느 것이나 아름답지만, 생존을 위한 현실은 가혹하고 추하기까지 합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인격을 팔아먹기도 하도,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부자들만 돈의 힘에 미혹되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 또 잘 살고 싶은 지독한 욕망과 근심, 불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가난의 영성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영성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이 가난이란 놈이 좋을 것 하나 없기는 해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지 않으면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배가 고프고 외로워 죽겠으니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고 두 손을 드는 이들,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내 존재의 전부를 이웃에게 의탁할 수 밖에 없는 이들, 함께 어깨를 걸지 않으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지 않으면 한줌의 부자들에게 당해 낼 재간이 없는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입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숨에 굶주린 이들이기에, 하느님 없이 혼자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의 숨에 따라 산다는 것은 선한 의미를 찾아 산다는 것이니, 그들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태 5,6) 이기도 합니다. 영으로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과 이웃의 도움이 없으면 자신의 허기와 갈증을 달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이기에,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남들 앞에서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배부른 이들이나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학하며 회의를 거듭하는 것도 자아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을 때나 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장 초라한 밑바닥까지 보이며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그 간절한 바람을 부자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습니다(루카 6,24 참조).

가난의 영성은 ‘연대’하고 ‘소통’하는 영성

그러므로 가난의 영성은 ‘연대’하고 ‘소통’하는 영성입니다. 가난의 영성으로 사는 이들의 시선은 가난한 이웃들의 몸과 마음으로 흐릅니다. 그래야만 다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밀양 할매들, 강정 활동가들, 쌍차 해고 노동자들이 세월호 가족들에게 지지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광화문 농성 천막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낮고 추운 곳에서 한 몸, 한 마음으로 얽힙니다. 예수는 이런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느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루카 6,20 참조).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늘 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하지요.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들끼리는 대화와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게 이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웃의 사정을 이해하는 가운데 내가 가진 것이 남들이 가진 것 보다 많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보다 부끄러워지기 시작하고, 없는 살림에도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되지요.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를 부추기는 자본의 질서에 길들어 있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만큼이나 엄청난 기적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교종이 다녀가신 하늘에 태양과 구름이 움직이는 게 기적이 아니라 이런 마음의 변화가 기적입니다).

방한 기간 동안 교종의 온화한 웃음은 어디에서나 빛났지만, 제 마음에 가장 깊게 남았던 그의 웃음은 시복식 미사 전, 퍼레이드 차량에서 내려 유민 아빠를 만나던 감격적인 장면에서, 유민 아빠가 그의 가슴에 달려 있던 뒤집어진 노란 리본을 바로 잡아 주었을 때 고마움을 표시하던 환한 그 웃음입니다. 아, 이분은 정말 영으로 가난한 분이구나, 가진 것 없는 자들과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연대하고 소통할 줄 아는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낮아지기 힘들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깨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여 권좌보다 정치적, 외교적 입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참사람과 의로움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을 일으켰습니다.

▲ 8월 25일 광화문에서 천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800여 명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한 단식기도회를 시작했다. ⓒ정현진 기자

지금, 참사람에 굶주린 우리가 찾아야 할 곳

교종이 떠난 자리를 채워 줄 참사람의 향기가 그리운 우리가 지금 찾아야 할 곳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는 광화문 광장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가장 서럽고 가장 영으로 가난한 그들과 함께 굶주리며 우리 스스로 교종의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모여 수사권 기소권이 보장되는 4.16 특별법 제정을 우선 이루어 내고, 또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한 줌의 부자들만을 위한 세상, 경쟁과 증오와 폭력이 관계의 규범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나의 빈궁함과 연약함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는, 함께 잃고 함께 채워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 하느님 나라를 그려 보아야 합니다.

지금,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그러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확인하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버리고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은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참사람에 굶주리고 의에 목마른 이들이 함께 모여 아우르는 힘은 돈의 힘보다 훨씬 강하고 뜨겁고 날카롭다는 것을. 불가능하리라 지레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교종의 방한 이전, 우리는 예정된 방한 일정을 보며 실망하고 그가 정치에 이용당할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사람의 힘”은 돈보다, 정치권력보다 강했습니다.

이국땅에 멀리 떨어져 사는 저는 광화문에 나가 함께 할 수 없지만 주말 단식으로 마음을 보탭니다. 그러면서 또 배웁니다. 저 또한 가난해 지기 위해 비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기에 혼자서 뭘 해보려 기를 쓰던 못난 습성이 제게 얼마나 깊이 배어 있는지요. 제게 어깨를 내어준 많은 이웃들 덕에 이제껏 살아있다는 것을 얼마나 쉽사리 잊는지요. 늘 긴장하고 살아온 제 어깨에 들어간 힘이 무겁고 부끄럽습니다. 배고픔이 저를 가르칩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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