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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텅 빌 때까지 퍼 주고 또 퍼 주고[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20]

동래 할머니 마당이 휑하다. 넓은 마당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콩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어머, 마당이 허전하네요. 콩 타작을 어찌 하셨대요?”
동래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그냥 웃기만 하시고, 할머니 집에 오시는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을 하신다. 광주 사는 아들이 와서 다 거두어 갔다고. 씨로 쓸 거 한 주먹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아들 집으로 보내셨단다.

“할머니가 꼬부라진 허리로 날마다 풀매고 물 주고 한 거 자네도 봤제? 이날 평생 자식 먹여 살린다고 고생했음시로 이때껏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밖에 모른당께. 부모 마음은 끝이 없어 끝이....”
“그러게요. 정말 끝이 없나 봐요.”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 말씀에 맞장구를 치며 아흔 넘은 할머니가 이럴 정도인데 다른 집은 어떨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봉 할머니도 아들 차에 이것저것 실어 보낸 이야기를 한참이나 하신다.

쌀, 대봉 감, 고칫가리...

“쌀 세 가마에, 대봉 감 한 상자, 사둔 것까지 고칫가리 스무 근, 며느리 이모 줄 고칫가리도 여섯 근, 무시 한 자루, 지름 두 병....”
“그렇게나 많이 보내셨어요? 차 바퀴가 찌그러졌겠네. 사둔도 모자라서 사둔 친척까지.... 뭘 그렇게 많이 퍼 주신대요?”
“아따, 줘야제. 사둔이 나한테 겁나 잘한단 말이여. 나도 공을 갚어야제. 농사지어서 나눠먹는 것도 사는 재미여.”

하고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추수를 마친 가을 들녘. 텅 빈 듯해도 텅 빈 게 아니다. 끝을 모르는 할머니 마음처럼 텅 빈 듯 가득 차 있다.ⓒ정청라

수봉 할머니야 농사짓는 땅이 넓으니까 퍼 줄 게 많아서 그렇다치고, 과연 땅 없어서 농사 못 짓겠다는 한평 할머니는? 마찬가지다. 적으면 적은대로 무엇이든 거두기만 하면 자식들 퍼 줄 생각부터 하신다. 고구마를 한 줄밖에 안 심어서 캘 것도 없다고 하시더니만, 고구마를 캐자마자 아들한테 전화부터 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고구마 캤다. 겁나 굵게 들었어. 택배로 보낼랑께 쪄 묵어라이. 잉? 땅콩도 까 놨응께 같이 보낼란다...”

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가지러 온다면 모를까 뭐 하러 보내느냐고. 그랬더니 “주고 자픈디? 뭐 있으믄 다 주고 자퍼.”라고 대답하시며 그리움에 젖은 눈망울을 보이신다. 우리 마을은 택배 보내기도 성가신데(외진 곳이라 택배 기사가 찾아오지 않는다. 면까지 가지고 나가서 부쳐야 한다.) 주고 싶은 마음에 불편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게다. 줘도 줘도 또 주고 싶은 마음에....

그 얘길 들으며 문득 어렸을 때 추억 가운데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무거운 보따리를 바리바리 챙겨 들고 서울에 오셨던 외할머니.... 당시에는 택배가 활성화되어 있는 때가 아니어서인지 할머니는 가을걷이를 마치면 농산물을 이고 지고 서울에 올라오셨다.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메고 양 손에는 바윗덩어리 같은 보따리 몇 개나 쥐고 말이다.

할머니 보따리는 요술 보따리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할머니 보따리는 별별 것이 다 쏟아져 나오는 요술 주머니였다. 참기름 몇 병, 단감 한 봉지, 쑥떡, 된장, 콩이나 팥 같은 것들….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들고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겠다 싶으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랬다. 육남매 다 나눠 주고 나니까 얼마 안 된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는 할머니가 가여워서 속울음을 울기도 했다.

부모 마음은 이렇게 끝이 없는데 자식들은 그 마음을 알기나 알까? 봄부터 가을까지 땡볕과 비바람, 모기떼를 견디어 가며 일군 먹을거리들을 오롯이 자식 품에 안겨 줄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 냈을 부모 마음을 말이다. 올해는 풍년이라 콩이며 쌀이며 다 헐값이라는데, 부모들이 실어 보낸 농산물이 자식들에겐 돈 몇 푼 안 되는 값싼 먹을거리로만 여겨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더불어, 아직까지는 내 입에 들어갈 먹을거리를 가꾸는 데만 골몰해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도 언젠가는 자식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퍼 주려고 농사짓는 그날이 올까? 그날을 기꺼이 손꼽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되길, 텅 빈 들녘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 올린다.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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