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17]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헤진 옷을 입고 있었다. 옷에 난 구멍을 가리느라 천을 덧대어 기운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 누더기 옷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옷이 찢어지고 구멍이 날 만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하면 곧바로 헤지고 낡은 옷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서 다울이 아빠를 만났는데, 그때 당시 다울이 아빠가 발뒤꿈치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양말을 신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도 구멍 난 양말을 신은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얼마나 없이 살면 저런 양말을 신을까 딱하기도 해서 자꾸만 구멍 난 양말로 눈길이 갔다. 구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뭐라도 챙겨 주고 싶고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졸지에 다울이 아빠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 거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저렇게 불쌍한 사람 내가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짝꿍이 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럴 수가! 막상 함께 살아보니 다울이 아빠에겐 새 양말이 아주 많았다. 이렇게 새 양말이 많은데 왜 구멍 난 양말만 신는지 원. 새 양말을 꺼내놓아도 구멍 난 헌 양말만 골라 신는 그에게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당신이 그런 걸 신고 다니면 내가 더 부끄럽다고 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으면 새 양말을 챙겨다 주는 사람이 많다나 뭐래나? 그렇다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단 말인가?

헌데, 더 오래 겪어보니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울이 아빠는 발뒤꿈치가 심하게 갈라지는 체질(?)이라 양말이 배겨날 수가 없었던 거다. 제 아무리 두껍고 튼튼한 새 양말이라 하여도 두세 번만 신으면 구멍이 나버리니 차라리 헌 양말을 신기는 게 낫지 싶었다. 훤하게 드러난 다울이 아빠의 발뒤꿈치를 볼 때마다 아내로서 직무유기는 아닌지 뒤가 켕기긴 했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저것도 패션이려니 하고 눈 딱 감고 모르는 척하고 말았다.

그 뒤로 몇 년, 신혼 초엔 그나마 남들이 볼까봐 민망해 하기라도 했으나 이제는 양말에 뚫린 구멍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지경(또는 경지?)에 이르렀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든 양말의 구멍이 커지다 못해서 발 토시 비슷한 모양새가 되었든 가만 내버려두고 있던 차에, 어느 날 한평 할머니의 양말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할머니께서 기운 양말을 신고 계셨던 것이다.

“어, 양말도 기워서 신으세요? 한번 벗어보세요. 어떻게 기웠나 보게.”
“뭘 봐? 기냥 기우면 되제. 양말도 못 기운당가?”

한평 할머니는 너무나 당연한 걸 모르는 나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시며 양말 한 짝을 벗어서 보여 주셨다.

“아, 이렇게 양말 천을 덧대서 꿰매야 하는구나. 이렇게 하면 정말 튼튼하겠네요.”
“이것도 모르간디? 나는 통 이렇게 꿰매서 신어. 비 오는 날이믄 양말 꿰매는 것도 재미져.”

자세히 들여다보니 할머니 바느질 솜씨가 썩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양말은 아주 짱짱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나는 왜 어떻게 할 생각조차 못했을까?

“구멍 난 양말 있으면 줘봐. 내가 꿰매줄텡께.”
“구멍 난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다 해주시려고요. 이거 한 켤레만 부탁할게요. 보고 따라하게요.”
“인 내봐(이리 줘). 당장은 말고 비 오는 날 꿰매올랑께.”

과연 할머니는 비 오고 그 다음 날에 구멍을 덧대어 더 튼튼해진 양말을 들고 나타나셨다. 내 자존심을 세워 주시려는 건지 애기 아빠한테는 할머니가 꿰매준 걸 비밀로 하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얼마나 고맙고 고맙던지 그 길로 당장 양말 꿰매기에 도전해보려 했으나 결국 그날은 바늘을 들지 못했다. 당장 해치워야 하는 집안일 때문에 바느질은 항상 뒷전이 되고 마는 걸 어쩌나.

▲ 한평 할머니가 꿰매준 양말. 할머니는 내게 바느질 솜씨가 탁월하지 않아도 누구나 양말을 수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다. ⓒ정청라

그러다가 엊그제야 비로소 바늘을 들었다. 그날도 애초에 바느질을 하려던 건 아닌데 빨래를 하려고 다울이 아빠가 벗어 놓은 작업복을 정리하다가 작업복을 찬찬히 훑어보게 된 것이다. 작업복 상태는 그야말로 동화책 삽화에서 보던 거지 옷! 단추가 다 뜯어지고 옷에 구멍도 여러 군데 나 있지 뭔가. 손목이 헤진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아무래도 땡볕에서 일을 하다 보면 땀을 많이 흘리게 되니까 땀에 삭아서 옷이 쉽게 닳는 모양이었다.

그 옷을 보니 식구들 먹여 살린다고 애쓰는 다울이 아빠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단추라도 달아 달라고 할 것이지 말도 안 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니.... 다른 건 몰라도 단추라도 새로 달아 줘야지 싶어서 바늘을 들었는데, 익숙한 일이 아니다보니 손놀림부터가 뻣뻣하다. 바늘귀에 실을 넣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실은 쉽게 꼬이고, 하여간 애가 터졌다. 옛날 어머니들, 그러니까 지금의 할머니들 세대만 해도 옷을 짓고 옷감을 짜고 실도 만드는 게 일상이었다는데 나는 단추 하나 제대로 못 다는 무력한 신세라....

그래도 말이다, 바느질을 마치고 나니 왠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영역에 한 발짝이라도 내딛었다는 데 대한 뿌듯함이랄까? 내 식구가 겪는 불편을 내 손으로 덜어 주었다는 데 대한 기쁨이랄까?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평 할머니처럼 바느질을 놀이 삼아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비 오는 날이면 바느질을 하면서 식구들 옷이나 양말에 내 온기를 더하는 거다. 그리하여 옷은 내 정성을 입고 새 생명을 얻는 거다.

한 걸음 바느질에서 나는 누더기 옷이 가난의 상징이 아니라 따스한 손길의 징표라는 것을 어렴풋이 맛보았다. 두 걸음 세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가족에게 진짜 자랑스러운 누더기 옷, 누더기 양말을 선물하고 싶다.

▲ 한평 할머니 집 댓돌 아래 할머니 고무신. 새 고무신을 신으면 발이 가렵다며 뒤축이 찢어진 낡은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니신다. ⓒ정청라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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