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제1회 가톨릭영화제에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네브라스카’(Nebraska, 2013)를 보았다. 국내 첫 상영이라고 한다.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관계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열렸던 이번 영화제의 취지와 잘 맞는 작품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관계란 무엇이며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맺음도 끊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단순히 덮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 진정한 회복이 가능해짐은 분명하다. 두 단어 모두 익숙한 듯하지만 막막하다. 답은 각자의 몫이다. 여러 단편이 빛난 가톨릭영화제 출품작은 관객에게 적어도 생각 거리만큼은 충분히 안겨 주었다고 본다.

가족은 관계의 기본이다. 그러나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만큼 복잡다단한 것도 없다.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이야기 나눠야 할지도 잘 모르는데 ‘사랑’부터 얘기하는 건 일을 망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를 위해 각자 열심히 살기는 했는데, 마주보지 않은 지 오래 됐다. 서로 길을 잃은 것일까. 영화 '네브라스카'는 그 총천연색처럼 깊고 다채로운 흑백화면 속에서 나직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조용히 곁에 머물며 지켜보는 사랑이 이뤄낸 작은 변화들이 영화 곳곳에서 반짝인다.

▲ '네브라스카'의 아버지 우디(브루스 던 분)(왼쪽)과 작은 아들 데이비드(윌 포테 분).(사진 제공=가톨릭영화제 집행위원회)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랑

알코올 중독과 알츠하이머가 진행 중인 우디(브루스 던 분)는 한 잡지사에서 보내 준 100만 달러 당첨 증서를 품고 700마일이나 떨어진 네브래스카 주의 링컨으로 가려고 한다. 가족들은 100만 달러 상금이 사기라며 말리지만, 상금으로 트럭을 사겠다는 아버지의 고집을 지지해주기로 한 작은 아들 데이비드(윌 포테 분)는 아버지와 여행을 떠난다. 복권 당첨 확인을 위해 링컨으로 가는 동안, 머리가 깨지고 틀니가 빠지며 병원에 입원하는 등 아버지는 ‘노망’ 든 할아버지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이처럼 막무가내인데 고집은 초지일관이다. 나중에는 신성한 의무처럼 된다. 아들 데이비드의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들은 툴툴대고 성화를 하면서도 늘 아버지 편을 들며 운전을 계속한다. 링컨에 가서 비로소 ‘현실’을 깨닫게 하자는 게 아들의 생각이었을까.

이해는 간다. 그 아버지가 그렇게 평생에 걸쳐 술을 마시고 또 마신 것도. 그런 아버지를 아들이 못마땅해 했으면서도 연민을 느끼는 것도. 인생이란 어차피 뒤죽박죽이니, 그냥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나마 들어드리고 싶었던 걸까. 패잔병처럼 늙고 초라해진 아버지가 ‘인생대박’의 꿈을 꾸는 이 간절한 뚝심과 열망을 며칠만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윽고 둘은 어느새 풀리지 않았던 인생의 고비에 대해 말없이 공감하는 동지처럼 된다. 이렇게 마주 앉아 얘기해 본 게 얼마만일까. 여자 친구를 놓치고 울고 싶은 아들은 “인생의 때가 언제인지 아버지는 아셨나요?”라며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한탄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건 없다는 투로 술만 찾는다. “저를 낳으실 땐 계획하셨나요?”라는 말에도 아버지는 “섹스(자막에 분명 그렇게 돼 있다.)를 좋아하다 보면 애가 생겨.”라고 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데이비드를 갖기 전에 아버지는 심하게 방황했고, 인디언 처녀랑 둘이 도망칠 생각도 했었다. 그 방황을 접고 데이비드를 낳은 시시한 ‘출생의 비밀’을 아버지 고향 주점에서 아버지의 ‘원수’에게 듣고야 만다.

▲ '네브래스카'의 한 장면.(사진 제공=가톨릭영화제 집행위원회)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창고에 숨긴 술 몰래 버렸다는 아들 앞에서 “니 엄마 같은 여자랑 살다보면 너도 술 마셨을 거다”고 태연히 말하는 아버지는 꾸밈도 가식도 없다. 귀먹은 듯 잘 알아듣지도, 발음을 잘 하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답변들은 어쩌면 아들한테 하는 얘기가 아닌 혼잣말이거나 푸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가끔 촌철살인도 있다. 구차한 변명보다 더 어이없는데도 왠지 수긍이 된다. 아들도 이젠 알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술로도 그 무엇으로도 견딜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을 겪어 봐서 아는 것이다. 아버지라고 그 삶이 견딜 만했겠는가. 어머니라고 그런 삶이 좋기만 했겠는가.

그나마 술로 달래고 누르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착해서’였을까. “네 아버지는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마셨겠지.”라는 아버지 고향 어른들의 얘기도 듣게 된다. 순하고 거절 못하는 착하고 성실한 젊은이는 ‘한국전쟁’에 참전 후 딴 사람이 됐고 술꾼이 됐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농장을 가꾸려던 꿈도 펴 보지 못했다. 다 늙어 기업이 호객행위로 뿌린 사기성 ‘복권 당첨’ 편지 한 장에 기대는 어리석음에라도 취하고 싶어 한다.

촌동네에선 ‘사랑의 승리자’였던 엄마가 고운 처녀 시절과 달리 억척 어멈으로 그악스럽게 살아야 했던 것도 다 이해가 간다. 가족의 무덤가에서 그들의 생전 에피소드를 생생하고 실감나게 ‘현재형’으로 들려주는 정 많은 엄마가 잔소리꾼으로 살아온 세월도 퍽 모질었을 것이다. 친정에서 받은 유산으로 도시에서 미용실을 꾸렸던 엄마의 생활력은 이 가족을 고향으로부터 등지게 한 것일까, 구원한 것일까? “나 말곤 제정신인 사람이 없어!”라는 어머니의 성화 속에서 술로 도피하던 아버지, 그런 집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으로 살아온 아들들에게도 다 사연은 있었다.

백만장자는 못 돼도 백만 달러짜리 사랑은 할 수 있다

사연 없는 삶이 있겠냐만 따지고 보면 또 그리 대단한 사연 있는 인생도 드물다. 자기에게만 절절할 뿐 막상 꺼내 놓으면 찌질할 수도 있다.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그리 내세울 것 없이 늙어가는 것이 대다수의 삶인지 모른다.

가족의 빛깔을 드러내기에 가장 좋았던 듯한 흑백. 그 흑백 화면이 어느 순간엔 인간들의 치기와 허영과 이기심으로 폭발할 듯 일렁이다가, 어느 순간엔 바다처럼 아늑하고 고요해지기까지 한다. 백만장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가 고작 “새 트럭과 콤프레서”를 사고 싶어서라는 아버지의 순진한 꿈, 그리고 아버지 주변 사람들의 탐욕 속에서 관객은 생각이 많아진다. 남에게 이용당하고 빼앗긴 것들 중 ‘콤프레서’가 특히 아프게 남은 아버지. 그거나마 되찾아 드리려고 두 아들이 개구쟁이들처럼 의기투합해 남의 집 창고를 터는 장면에서는 왠지 가슴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감동이 있다. “그 집이 아니다”는 뒤늦은 아버지의 훈수에 낑낑대며 되돌려 놓은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그 와중에 데이비드는 “너희에게 뭐라도 좋으니 남겨 주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진심을 듣게 된다. 백만장자에 대한 꿈이 그리 소박한 소망이라면, ‘돈’은 없어도 꿈 비슷한 것은 이룰 수 있었다. 그 정도 소원이야 이루어 드릴 수 있다,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아들은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새 차나 다름없는 5년 된 트럭’과 마트에서 사 온 새 콤프레서로, 고향을 거쳐 집에 돌아가는 아버지를 운전석에 앉은 젊은 백만장자처럼 당당하게 만들어 드리고야 만다. 발병 이후 운전대를 놓아야 했던 아버지는 망설이지만, 아들은 그 직진 도로를 기어이 아버지에게 밟게 한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조수석의 아들에게 거침없이 명령한다. “숙여!”

▲ 철로를 달리는 작은 아들 데이비드.(사진 제공=가톨릭영화제 집행위원회)
아버지의 옛사랑과 동네 친구들이 지켜보는 동안, 아버지는 잠시 정말로 백만장자가 된다. 돈키호테보다 더 당당한 기사가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백만 달러짜리 사랑이었다.

길을 떠나도 머물러도 방황의 연속이며, 머물면 부동자세로 텔레비전이나 쳐다보는 소파 붙박이로 굳어 가는 이 공식 같은 규칙. 그것을 어느덧 운명처럼 여기며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늙어가는 우리. 차와 집과 돈 얘기 말고는 할 것이 없는 대화와 두고두고 혼자 곱씹어야 하는 억울함과 슬픔. 자본주의적 삶에 순응한다는 것은 그렇게 조용히 정물이 혹은 퇴물이 되어가는 것일까. 그것을 깨려는 아버지는 돈키호테처럼 어이없게 그리고 돈키호테처럼 호쾌하게 삶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게 된다. 끝내 남자로서, 남자답게. 그 아버지가 걸어왔고 그 아들이 꿋꿋이 걸어가게 될 그 길을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터무니없는 여행은, 결국 불쌍하고 짜증스럽게 보이던 아버지의 ‘노망’을 관객으로 하여금 기립 박수를 치게 만들고 싶을 정도의 ‘영웅담’으로 바꿔 놓는다. 그 정도의 작은 기쁨과 작은 기적이라면, 시도해 볼 수 있다. 그 정도의 정성으로도 삶의 한 페이지는 다시 쓸 수 있다. LA 비평가협회는 아버지 역을 맡은 브루스 던에게 남우 주연상을 선사했다. 네브래스카 링컨에서 날아온 편지는 진짜 ‘복권 당첨’의 희소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원(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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