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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다리[할머니 탐구생활 - 16]

다랑이가 졸려하기에 업고 밭으로 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할머니들 사는 집을 슬쩍슬쩍 넘겨다보며 골목길을 걷는데 동래 할머니가 툇마루에서 발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어 초조한 듯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처럼 처량해 보이기도 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몇 번 망설인 끝에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뭐하세요?”
“애기가 참 많이 컸네. 자네가 욕 봤어.”
“지가 알아서 컸죠 뭘. 점심은 드셨어요?”
“(못 알아 들으셨는지 그냥 빙긋이 웃으시며) 밭에다 뭐 좀 심었을까?”
“저희 먹을 거 이거저거 심었어요.”
“(또 못 알아 들으셨는지 빙긋이 웃으시며) 커피 좀 끼리까(끓일까?)”
“아뇨, 커피는 못 먹어요.”
“커피가 뜨거워?”
“….”

말문이 꽉 막혔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말은 서로에게 가 닿지 못하고 평행선을 탔다. 할머니의 귀가 더 많이 어두워지기도 했고, 정신이 더 아득해지신 것도 같고, 할머니에겐 내 말투가 귀에 설기 때문에 더 안 들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 풀을 다 매고 집으로 들어가시는 중... 할머니 허리는 굽다 못해 둥그렇게 휘었다. 호미처럼 말이다.ⓒ정청라

서로 어색한 미소만 주고받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다랑이를 포대기에서 내렸다. 다랑이는 낯설게만 보이는 할머니 집을 구석구석 살피더니 마침내 탐색을 끝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다가가 손도 한번 만져보고 할머니가 마루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외출용 신발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동래 할머니는 연신 웃으면서 아이 모습을 지켜보셨다. 그러더니만 갑자기 굽은 몸을 힘들게 일으켜 세우시더니 방에 들어가신다. 방 안에서 사탕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사탕을 몇 개 꺼내 주시려는 모양이었다.

“애기 사탕 못 먹어요. 저 그냥 갈게요.”

나는 그 말만 불쑥 던지고는 얼른 다랑이를 들쳐 업고 할머니 집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멋쩍은 시간을 벗어난 데 대한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어떻게 동래 할머니 집에 놀러간단 말인가. 동래 할머니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으신 분이다 보니 다가가서 묻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일상적인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기가 어려우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로 함께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재미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게 계속 고민이 된다. 동래 할머니뿐 아니라 다른 할머니들의 경우도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으니 마주 앉아 있는 게 지루하고 답답할 때가 많다. 젊은 할머니들의 경우는 덜한데 나이가 많고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들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그저 마음뿐이다. 그나마 다울이와 다랑이가 다리 역할을 해 주지만, 아이들 재롱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다가 ‘그림책의 힘’이란 책에서 나이가 들수록 그림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읽고 그림책을 들고 가볼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분명 눈도 어두우실 게 뻔한데, 갑자기 책을 들고 가면 생뚱맞게 느끼실 텐데, 하는 생각에 행동을 멈춘다. 다울이가 좀 더 자라서 할머니들에게 그림책을 읽어드린다면 모를까 내가 하기엔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 볼까?

마침 우리 집 담벼락 앞에 소리실 할머니가 앉아 계시기에 슬쩍 다가가서 부탁해 보았다. “할머니, 다울이가 옛날이야기 듣고 싶대요. 옛날이야기 좀 해주세요.”하고 말이다. 그랬더니 웃기만 하신다. 언젠가 노래를 흥얼거리시는 걸 들은 기억이 있어서 “할머니 잘 하시는 노래 좀 불러 주세요.”라고도 해 보았지만 역시 배시시 웃기만 하실 뿐이다.

   
▲ 작고 앙증맞은 동래 할머니 텃밭. 아흔셋 나이에도 아침마다 풀을 매러 나오신다.ⓒ정청라

그러니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강이다. 다리가 끊어진 지 오래라 아득한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 더 늦기 전에 다리를 새로 놓아 할머니 삶을 깊이 있게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내가 다리를 놓지 않으면 이 다음 세대는 강 너머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말 텐데. 더 늦기 전에, 동래 할머니 정신이 더 아득해지기 전에, 우리들의 보물을 함께 찾아내야 할 텐데.

오늘 나는, 할머니라는 보물 창고를 지척에 두고도 열쇠가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하느님께서 열쇠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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