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14]

아침저녁 쌀쌀한 바람과 한낮의 땡볕이 묘하게 어우러진 가운데 가을이 무르익어 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퍼렇던 감이 오늘은 슬며시 주황빛을 머금고 있는가 하면 애호박도 무서운 기세로 여기저기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곧 있으면 밤송이도 툭툭 떨어질 테고 땅속 고구마도 잡아먹기 좋을 만큼 굵어질 것이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가을은 가지각색 선물을 받는 시간, 그것도 한꺼번에 왕창 쏟아지는 선물이니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모른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가만히 있어서는 선물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지난 가을 도토리만 해도 그렇다. 도토리 풍년이라 아이들과 산책을 다니며 주운 도토리가 소쿠리로 한 가득 되었다. 다울이도 나도 도토리를 보며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엄마, 우리 도토리로 빵도 만들고 떡도 만들고 부침개도 만들자.”
“그래 그래. 도토리묵도 쒀야지. 엄마는 도토리묵 해 먹는 게 오랜 소원이었어. 우리 꼭 이것저것 만들어 보자.”

그렇게 약속을 했건만 결국 도토리는 몽땅 벌레 차지가 되어 버렸다. 열심히 주워서 햇볕에 말렸는데 어느 날 수봉 할머니가 보시더니만 “뭐여. 싹 다 벌레 먹었구만. 물에 담갔다가 얼릉 해 묵어야제 이렇게 놔 두믄 못써” 하시는 거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더니 속에서 벌레가 도토리살을 다 파먹고 있었을 줄이야. 할 수 없이 내년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도 도토리를 주워만 놓고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안 해 본 걸 하려면 왜 이렇게 미적거리게만 되는지 원.

그런데 친정 엄마가 오시더니 며칠 만에 뚝딱, 마술을 부리듯이 도토리묵을 만들어 내셨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만들까 궁리만 하는 나와 달리 친정 엄마는 도토리를 줍는 족족 바로바로 껍질을 벗기고 물에 담가 우리는 등 일사천리로 행동을 하신 거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토리는 벌레 밥이 되지 않고 묵으로 부활! 덕분에 쫀득쫀득하고 보드라운 ‘리얼 도토리묵’을 맛볼 수가 있었다.

▲ 도토리살을 물에 담가 우려내고 있다. 친정엄마가 하시는 걸 지켜봤으니 나도 한번 따라해봐야지. 낯설어도 자꾸 해봐야 내 것이 되리라. ⓒ정청라

도토리묵뿐만이 아니다. 친정 엄마는 신랑이 밭에서 솎아 온 어린 배추로 후닥닥 산뜻한 김치를 담가 밥상에 올리셨다. 병이 들어 붉은 고추가 되기 전에 썩어 버리는 고추는 파랄 때 다 따서 그걸로 장아찌도 담그고 고추무름 반찬도 하시고, 김치 양념용으로 들들 갈아 냉동실에 얼려 두시기도 했다.

“좀 있다가 무 솎으면 풀만 쪼금 쒀 가지고 고추 갈아 놓은 거랑 멸치젓 넣고 김치 담가봐. 얼마나 맛있다고.”
“파란 고추도 김치 담글 때 갈아 넣어도 돼?”
“그럼. 이맘 때 담그는 김치는 그래야 더 시원하고 맛있어. 엄마 어릴 때는 솎음지 담그면 거기다가 고추무름 넣고 냇가에서 잡은 새비(민물새우) 데쳐서 넣고 해서 밥 비벼 먹었어. 그 맛이 아직도 생각난다니까.”

그러고 보니 시골 출신인 친정 엄마에겐 고향에 살던 때 먹었던 그 맛이 고스란히 기억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맛이 곧 이정표와 같은 레시피가 되어 요리로 마술을 부리시는 것이다. ‘이맘 때 이 재료, 이 재료로는 무엇을’이라는 몸이 기억하는 자연스러운 공식에 입각하여서 말이다. 그 덕분에 벌레 밥이 될 뻔한 도토리는 묵이 되었고, 배추 솎아낸 것도 시들기 전에 김치가 되었다. 고추도 썩어 없어지기 전에 여러 가지 반찬이 되었다. 진정한 요리란 이렇게 지금 주위에 있는 재료를 모두 다 살려내는 요리가 아닐는지....

그러고 보면 요리는 굉장한 행동력과 민첩함이 요구되는 일이다. 주저하거나 멈칫거리다간 ‘바로 그 맛’을 만날 수가 없으니까.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예민함은 필수다. 철마다 달라지는 여건 속에서 ‘바로 이 재료’를 찾아 내서 또 다른 재료와의 어우러짐까지 계산해야 하니까.

지난 며칠 간 친정 엄마가 차려 주신 싱싱하고 풍성한 밥상을 마주하며 엄마가 나보다 요리를 잘 하는 건 엄마에게 ‘제철 감각 본능’이 살아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비단 친정엄마의 경우만이 아니라 마을 할머니들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할머니들 말속에서 나오는 ‘징하게 맛난 그 맛’은 그냥 혀끝에서 노는 맛이 아니었다.

“가을 찬바람 날 땐 호박잎이 최 맛나. 쌈장 맛나게 볶아가꼬 싸 먹어 보랑께.”
“고등어는 말이여, 시안(겨울)에는 김치에 지져 먹어야 맛나. 여름에는 감자에 지져 먹으면 맛나고, 가을엔 고구마 줄기 넣고 지져 먹어봐. 징하게 맛나.”
“토란 잎싸귀도 말렸다가 먹는 거여. 한 장씩 펴서 말렸다가 겹쳐서 접어. 그렇게 꽁꽁 싸서 묶어놨다가 보름에 데쳐가꼬 밥 싸 묵어 봐. 월매나 맛나다고.”

그것은 할머니들의 몸이 기억하는 맛이었다. 제철 감각 본능이 일깨우는 바로 그 맛,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알뜰하게 모두 다 살려내는 그 맛! 결국에는 그 맛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까?

친정엄마 덕분에 제대로 된 도토리묵 맛을 온 몸으로 기억하게 된 나도 이제부터는 보다 민첩하고 행동력 있게 도토리묵 만들기를 시도하게 될 것 같다. 그리하여 먼 훗날 젊은 새댁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토리를 주서 가꼬 벌레 먹기 전에 물에 담가서 우렸다가 묵 써먹어봐. 징하게 맛나! 참말로 징하게 맛나당께.”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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