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올 추석은 일렀다. 햇과일은 맛이 충분히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과 먹고 남을 만큼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수입하는 농산물과 음식은 그만큼 많다. 석유로 농사를 짓는 세상이 계속되는 한 음식의 3/4를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이런 호강은 오래가지 않을 텐데 예로부터 한가위만 같기를 바랐던 우리 마음의 원천은 풍족한 음식에 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세상이기를 바랐을 것이 틀림없다.

인터넷 공간에 체육학과 출신 남성 4명에게 폭행당했다는 한 여성의 무참한 사진이 나돌았다. ‘묻지마’ 폭행이었다. 그 여성은 가해자를 두둔하는 듯한 경찰의 무성의에 분노했다. 2008년 6월, 일본 도쿄의 번화가 아키하바라에서 끔찍한 사고가 백주대낮에 발생했다. 일요일 차 없는 거리의 인파를 향해 트럭으로 돌진한 청년이 생면부지의 이웃에게 등산용 칼을 마구 휘둘러 7명을 죽이고 10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증오했다고 당시 언론은 전했다. 패전 후 호황을 누렸던 일본에 1990년대 이후 닥친 장기불황이 걷히지 않자 나타난 사회적 일탈로 지적하는 사회학자가 있었지만 덮고 지나길 일은 아니었다.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사회의 배경이 문제가 되었다.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된 사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가난했던 시절에 없었던 분노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키하바라의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후 한 일본인은 쓰러진 시민을 보고도 외면하는 세태를 낙담하는 글을 우리나라의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피 흘리는 시민을 구하려 응급처치에 나서는 이보다 그냥 피해 제 갈 길을 서두르는 시민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 참담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우리나라는 어떨까? 6년 전 아키하바라의 폭행 사건에서 보여준 무관심이 재현된다고 해도 놀랄 사람은 드물어졌을 것 같다.

칼을 휘두르는 가해자를 지나가는 행인이 제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고 범인은 검거되었다. 대부분의 행인은 어떻게든 처리될 것으로 믿고 가던 길을 재촉했을 텐데 어떤 행인들은 처참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고 한다. 그런 장면 다시 볼 기회가 없지 않은가?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버젓이 짜장면과 피자를 입에 넣는 젊은이는 다를까? 공감 능력을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2008년 '아키하바라 사건'이 일어났던 도쿄의 아키하바라 거리. 사진출처/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덩치 큰 남성 4명이 여성을 폭행할 때 제지하는 이가 없었던 모양인데 다시 보기 어려운 그 장면을 촬영한 사람은 있었을까? 폭력을 저지하다 괜스레 다칠 수 있다. CCTV가 넘치는 세상이므로 갈 길 바쁜 이들이 외면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묻지마 폭력’은 어느새 우리나라에도 일상이 된 느낌이다. 호기심으로 폭력 장면을 사진으로 담는 이가 없다는 건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날 용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70살 노모를 때려 숨지게 한 40대 남성이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도 이상의 자초지종을 알 수 없지만 용돈은 40대 아들이 노모에게 드려야 도리라는 거, 그 남성이 몰랐을 리 없다. 용서받지 못할 폭력을 저지른 그는 돈이 왜 없었을까? 실직한 걸까? 속도와 경쟁, 목표가 숭상되지 않던 시절, 아무리 가난해도 나이 든 부모에게 용돈 요구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이는 없었다. 이웃의 어려움은 주변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 노력했다.

아키하바라에서 행인에게 트럭을 몰고 간 젊은이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실직 상태였다. 경쟁에서 밀리면 소외되고 마는 현대사회는 주류사회에서 이탈한 주변인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데 참으로 인색하다. 소외되었다 믿는 이에게 남은 행동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라고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쟁보다 소외가 심해지는 사회일수록 그 정도는 심화될 것이다.

실직자를 포함해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모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요즘 묻지마 폭력은 경쟁이 지배하는 ‘불안 사회’의 어두운 일상이리라. 기회가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유난히 자신에게 현실이 가혹하다 느낄 때, 그런 처지를 이해해 줄 이웃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는 세상을 저주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없지 않다. 공감하면서 격려하고 함께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주는 이 아직 많다.

길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구한 고등학교 여학생의 미담이 새삼스러운 요즘,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시원해졌다. 추석이 지나면서 한낮의 햇볕이 뜨거워도 그늘에 들어서면 참을 만하다. 분명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갈무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계절이다. 수입 식량이 지배하는 세상이더라도 가을은 풍요롭다. 곧 겨울이 다가올 텐데 추워지기 전에 경쟁보다 나눔이 우선하는 풍성한 세상이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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