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정일우 신부 영결미사..."“내 장례식을 축제처럼 지내라"

▲ 에수회 기수현 신부가 고별식을 행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제정구 씨와 더불어 한국 빈민운동의 영적 아버지로 불리던 예수회 정일우 신부(본명 존 데일리)의 영결미사가 6월 4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신수동 예수회센터 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병호 주교(전주교구)를 비롯해 50여 명의 사제들과 200여 명의 수도자, 지인들이 참석해 고인의 저승길을 배웅했다.

미사를 주례한 신원식 신부(한국 예수회 관구장)는 정일우 신부가 병환 중에 “빨리 나아서 캄보디아에 가고싶다”고 말했다고 전하며 “이처럼 정 신부님은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했다. 비록 캄보디아에 가시지는 못했지만, 그 후배 신부들이 캄보디아에서 대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인도 아이가 아버지에게 “시바신은 왜 몸이 파래요?”하고 묻자, 아버지가 “시바신은 세상의 독을 다 빨아들여서 몸이 파랗다”고 말했다며, 정 신부 역시 세상의 독을 다 빨아들이고 가셨다고 전했다.

“정 신부님은 8일 피정을 하시고 나면 늘 5일 동안 설사를 하셨다. 아마 당신이 그동안 빨아들인 세상의 독을 피정을 하시면서 다 밖으로 내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가진 어둠과 악함, 상처들을 다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분은 마지막 10년 동안 병고를 치르면서 세상의 모든 독을 다 빨아들이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원식 신부는 “우리가 그분의 삶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축복이며 영광”이라며 “그분의 사랑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으면 그분은 우리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 신부님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청한다”면서, “그분이 하느님 나라에 가시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정일우 신부의 삶을 복음적 모범으로 삼았다.

▲ 정일우 요한 신부
이날 강론을 맡은 박문수 신부(예수회)는 예수회 수련장 시절 정일우 신부는 수련수사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달동네 체험을 하도록 했는데, 이런 권고에 항의하는 수련자에게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예수회 활동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결국 그 수사는 퇴회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전해 주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정일우 신부는 “몸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해 왔고, 양평동에서, 복음자리에서, 상계동에서 괴산에서 빈민이나 농민들과 살면서 “어머니처럼” 희망과 위로를 주면서 우정을 나누어 왔다고 전했다.

정일우 신부에게서 주교 서품 피정을 받았던 이병호 주교는 추도사를 통해 “예수회 이냐시오의 정신훈련이 낳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뿐 아니라 정일우 신부도 마찬가지”라면서, “나는 이런 분들을 조금이라도 닮아보려고 했는데, 나는 껍질만 닮고 정 신부님은 속알을 닮아서, 그분을 보면 예수님을 직접 뵙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어 “내 장례식을 축제처럼 지내라”는 정 신부의 유언만큼 정 신부의 진면목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고 말했다.

상계동에서부터 정일우 신부와 빈민활동을 함께 했던 손인숙 수녀(성심수녀회)는 정일우 신부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소개했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살던 시절은 “정일우 신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뭐든지 하던 시기”라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좀 더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두 번째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시절”이다. 당시 정 신부는 손 수녀에게 “뭔가 해줘야 한다는 생각하지 말고 그저 함께 사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하곤 했는데, 당시 정 신부는 천막이든 어디든 ‘아무데서나’ 자고 먹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세 번째는 정 신부가 환자가 되어 “실제로 가난한 사람이 된 시절”이다. 정 신부는 병이 들면서 다른 가난한 이들처럼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곤 했는데,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그 악을 드러내는 자유도 누렸다”고, “그게 그분의 매력”이라고 전했다.

정일우 신부와 깊은 우정을 맺었던 제정구 씨의 아내였던 신명자 씨는 “신부님을 만난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며, “그분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키워내고 단련시켰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전했다. 정 신부는 “익살과 해학, 장난이 심한 자유인”이었으며, “당신의 사랑을 몽땅 우리에게 주고 가신 분”이라며 “아직도 자신을 몽땅 내어주지 못하는 우리가 얼마나 가여우셨을까” 애석해 했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삶의 기준점이 되도록 해주신 분”이라며 “돌아가시더라도 하늘의 별이 되어, 세상의 바람이 되어, 심지어 민들레꽃이 되어서라도 저희에게 와 달라”고 부탁했다.

▲ 참석자들은 정일우 신부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한상봉기자

용인 천주교 공원 묘지에 묻힌 정일우 신부는 지난 6월 2일 오후 7시 40분 선종했다. 정일우 신부는 미국 예수회 위스칸신 관구에 입회하여 1960년에 한국에 들어왔으며, 1966년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예수회 수련장과 한국지구 부지구장 및 양성담당을 맡았다.

그동안 빈민운동에 투신해 복음자리마을, 한독주택 마을, 목화마을 등을 건립하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86년에는 제정구 전 의원과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수상했다.

예수회 한몸공동체 초대 원장을 맡았으며, 충북 괴산에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살다가 2004년 64일간의 단식기도 중 쓰러져 병고를 치르다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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