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5]

조선의 실학자들은 선교사들 없이 예수회 사제들이 저술한 한역서학서를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예수회 사제들은 유교식 조상 제사를 자녀가 죽은 부모에게 드리는 효도의 상징적 표현이고, 사회적 의례라고 여겨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한역서학서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조선 교회의 신자들은 당연히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뒤늦게 중국 선교에 뛰어든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사들은 제사가 조상을 신적 존재로 섬기는 종교 행위로, 미신 또는 우상 숭배라고 판단하고 금지했다.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42년 칙서 <엑스 쿠어 싱굴라리>(Ex quo Singulari)를 통해 조상 제사에 대한 금지 명령을 내렸다.

백병근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1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천주교 신앙에 따라 조상 제사 금령을 지키다가 순교한 진산 사건에 대해 강의했다.

▲ 1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백병근 선임연구원이 진산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선영 기자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으로 파견됐던 윤유일은 조상 제사 금령에 대해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베아 주교에게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교황만이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주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1790년 조선교회에서 본인에게 보낸 질의와 질문 중에 조상들의 신주를 세우거나 또는 이미 세운 신주를 보존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본인은 베네딕토 교황의 칙서 <엑스 쿠오>(Ex quo)와 클레멘스 교황의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한 성청의 아주 명백한 결정에 의거해 부정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1797년 5월 15일, 구베아 주교가 사천교구 생 마르탱 주교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신주와 제사 문제에 관한 금지 명령을 접한 신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백병근 연구원은 “현직 관료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조상 제사 금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해 교회를 떠났고, 양반의 특권을 포기하거나 혹은 천주교를 통해 이상사회를 구현하길 바라는 사람들은 교회에 남았다”고 말했다.

제사 금령을 전달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1791년 5월, 정약용과는 고종사촌, 유항검과는 이종사촌이었던 윤지충이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머니 권 씨는 평소에 자기가 죽거든 장례식에 천주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윤지충은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한 후 어머니의 유언과 교회의 지시에 따라 상례는 갖추었으나, 음식을 차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의식은 하지 않았다.

이후 진산군에 윤지충이 권상연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가장 먼저 여론화한 홍낙안(洪樂安, 1752~?)은 진산 사건에 관한 장문의 편지를 만들어 사대부와 선비들에게 돌렸고, 이를 계기로 사건이 확대되자 진산 군수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이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곳에 피신했다가 삼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26일 저녁 관아에 자진 출두해 심문을 받았다.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 됩니다. …… 집 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올리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윤지충의 공술서 중)

같은 해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배교를 거부하고,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백 연구원은 “사람들에게 사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9일 동안 두 사람의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놓았고, 윤지충이 살던 전라도 진산군은 5년간 현으로 강등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문초를 받은 뒤 배교하고 풀려났다. 특히 이승훈은 체포되어 문초를 당한 뒤 나왔으나 벼슬을 빼앗겼고, 권일신은 예산으로 귀양을 가는 길에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 교리와 유교가 서로 보완해 준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산 사건 이후 천주교와 유교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백 연구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보유론적 천주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또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은 양반 신분의 신자들이 많았으나 진산 사건으로 인한 박해 이후에는 중인 이하 신분층에 속하는 신자들이 늘었다”며 “현실 사회 개혁적인 신앙의 태도가 내세 지향적으로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반면 진산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들은 어버이도 안중에 없이 막된 행동을 하는 불효자, 인륜을 저버린 금수의 무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조상 제사 거부는 이후 100여 년을 두고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구실과 이유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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