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4]

1784년 음력 9월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 정약용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졌다. 이후 우연히 관아에 적발돼 체포당하는 시련을 겪기 전까지 이들은 함께 모여 선교하고, 천주교를 반대하는 유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신앙집회를 가졌다.

지난 24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백병근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을사추조적발사건, 가정직제도와 성직자 영입운동 등의 사건을 통해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닥친 어려움에 대해 강의했다.

처음 이벽의 집에서 이루어졌던 신앙집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발각의 위험이 높아지면서 그해 겨울부터 중인 계급인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져 세례식과 교리 강습을 계속했다. 백병근 연구원은 “초기 신자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신앙 모임을 가졌고, 중인층과 양반층이 모두 출입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확보되어 양근, 내포, 전주 등 지방까지 신자들이 확대되었다”고 김범우의 집에서 이루어진 모임의 교회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김범우의 집에서 모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추조는 형조의 다른 말로 법률 · 소송 · 형옥 · 노예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말한다.

“을사년 봄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김범우의 집에서 설법을 하였다. …… 형조의 금리(禁吏)가 그 모임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는 것인가 의심하여 들어가 보았다. 모두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썼으며 거동이 해괴하고 이상해서 체포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화상과 서적들 그리고 몇 가지 물건들은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로서 잘못 들어간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타일러 내보내고,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 (이만채의 <벽위편>)

백 연구원은 “을사추조적발사건은 천주교 탄압을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앙 운동이 조정과 유교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지식인들은 척사론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후, 양반이 아닌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유일하게 풀려나지 못했던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어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증거자이자 희생자가 되었다.

▲ 24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백병근 선임연구원이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선영 기자

1년 후 다시 모임을 열어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고,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그 와중에 효율적인 선교활동과 늘어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대책이 필요하다고 여겨, 이승훈이 10명의 교우들에게 미사를 집전하는 권한을 주는 가성직제도를 실시했다.

“그들은 각기 자기 임지로 직행하여, 설교하고, 세례를 주고,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미사 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는 등 일종의 신자 행정을 시작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 샤를르 달레)

물론 이 10명의 평신도들이 집전한 성사는 교회법적으로 모두 무효였다. 게다가 임의로 성직제도를 수립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거행한 것은 독성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백 연구원은 “조직적으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고, 비신자들에게 생생하게 천주교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천주교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가성직제도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승훈은 자신들이 가성직제도로 독성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교리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 북경에 있는 선교사들과 상의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1789년 10월 여주 양반 출신의 윤유일이 장사꾼으로 변장해 북경으로 떠났다.

이듬해 4월 윤유일은 “사제가 없을 때 신앙생활을 하는 요령, 사제들이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것, 젊은이 몇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어 신학교에서 사제로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것” 등의 내용이 담긴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사목서한을 읽은 신자들은 성사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져서 성직자를 영입하자고 결심했다.

“결국 우리를 직접 가르치고, 우리에게 보다 효력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제를 구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떨어진 깊은 구렁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해날 수 있겠습니까?” (1790년 7월 11일에 이승훈이 작성한 서한)

윤유일은 성직자 영입을 위해 이승훈이 작성한 서한을 들고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결국 1791년 2월 마카오 출신의 레메디오스 신부가 조선 선교사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윤유일과 레메디오스 신부의 일정이 엇갈리는 바람에 성직자 영입은 이루지지지 않았다.

다음 강의는 조선 천주교회를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계기가 된 진산사건에 대해 다룰 예정으로 5월 1일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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