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3]

18세기 후반, 성호학파 학자 권철신은 자신이 이끌던 이른바 ‘녹암계’의 신진 학자들과 매년 사찰에 모여 강학(학문을 연구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학자들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두루 다뤘는데, 특히 1779년 주어사(현 경기도 여주시)에서 열린 강학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시초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서학을 연구하고 토론한 학자들 중 일부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승훈의 세례와 신앙 공동체의 설립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양인성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0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1779년 주어사 강학은 ‘한국 천주교회 설립을 위한 선행적인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해당 강학과 관련한 역사 자료는 정약용이 작성한 권철신과 정약전의 묘지명, 샤를르 달레 신부가 집필한 <한국천주교회사>가 대표적이다. 양 연구원은 이들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비교하면서, 230여 년 전 한국 천주교회 설립의 씨앗이 뿌려지던 순간을 재구성했다.

▲ 10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양인성 선임연구원이 조선 천주교회의 설립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한수진 기자

두 묘지명과 달레 신부의 기록이 말하는 공통된 내용은 권철신이 제자들과 강학을 열었고, 그 모임에서 서학이 다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 사료가 제시하는 시기와 장소, 강학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강학이 1777년에 열렸다고 기록한 반면, 권철신의 묘비명에는 1779년으로 나와 있다. 다수의 연구자들은 정약용이 강학 참석자들과 교유가 깊었고, 묘지명에 기술된 다른 사건들이 발생한 시기와 맞춰볼 때 정약용의 기록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강학이 개최된 시점을 1779년으로 보고 있다.

강학이 열린 장소를 두고서도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는데, 권철신의 묘지명에는 “천진암 주어사”, 정약전의 묘지명은 “주어사”, 달레의 책에는 “외딴 절”이라고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은 1779년에 열린 강학이 주어사에서 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권철신의 묘지명과 정약전의 묘지명에 모두 ‘주어사’가 나온다는 점, 그리고 달레의 기록에서 “이벽이 강학 장소를 찾았을 때, 예상과는 달리 강학의 장소가 변경되어 있었다”고 한 내용에 주목해서다. 다른 사료를 보면, 이벽은 이전에도 천진암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으므로 혼자서 천진암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달레의 기록에서 이벽이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강학 장소를 찾아갔다는 것은 강학이 열린 곳이 천진암이 아닌 다른 장소라는 뜻이다.

강학의 참석자는 권철신과 정약전, 이벽,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자료를 통해 확인된 인원만 총 6명이다. 양 연구원은 “이들은 강학이 열렸을 당시 같이 학문을 연구하고 교류했지만, 이후 천주교 신앙의 수용을 놓고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이벽과 정약전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반면, 김원성은 서학을 배척하는 데 앞장섰다.

양 연구원은 강학의 내용에 관해서는 본래 모임의 목적이 유학 연구였지만, 서학서가 검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강학 참석자들이 모임 이후에 천주교 신앙생활을 실천했다는 달레 신부의 기록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견해다.

정약전의 묘지명에는 이벽이 1784년 정약전 형제에게 천주교 교리를 소개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만약 정약전 등이 주어사 강학 이후 교리를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했다면, 5년 후 이벽이 교리를 설명할 때 놀라지 않았을 거다.

양 연구원은 “주어사 강학이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모임이라고 단언할 수 없으며, 강학의 결과 천주교 신앙의 적극적 실천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권철신과 그의 제자들이 주어사 강학에서 서학을 연구하고 토론한 이후,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고 그중 일부는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1784년 이승훈이 이벽의 제안으로 중국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게 되면서 조선에 천주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양 연구원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교회가 설립된 조선의 사례는 세계 교회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18세기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확산 이후 천주교의 위상이 흔들리고 약화된 상황이었다. 때마침 아시아 선교의 핵심 역할을 해왔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력 약화로 더 이상 선교를 지원할 수 없었다. 먼저 선교가 시작된 중국과 일본에서는 교회가 탄압을 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양 연구원은 “이런 상황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신앙의 꽃을 피우고 오랜 박해에도 신앙을 유지해온 것은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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