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와 교회 - 4]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자살부터 최근 세 모녀 자살에 이르기까지 사회안전망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죽음과 사회의 무관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에게 돈을 주면 투자이지만,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면 복지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올 만큼 복지를 국가적 경쟁력에 쓸모없는 낭비 요소로 몰아가는 기막힌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방 짙은 어둠 속에서도 깜박거리는 저 희망의 불빛들을 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본소득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입니다.

작년에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 국민투표를 하자고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녹색평론>에서 국민소득에 대해 지속적으로 소개되고 있었으며, 지금은 홍세화 선생, 강남훈 교수 등 점차 많은 이들이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재산이나 소득에 관계없이 국민 모두가 일정한 금액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는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던 월 20만원 노인기초연금, 그리고 무상급식도 해당 대상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재원 마련을 위해 세율을 인상해야 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보완되어야 하겠지만, 누군가는 먼저 자꾸 꿈을 꾸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야 합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기본 지식은 거의 <녹색평론>에서 얻은 것입니다만 협동조합과 관련하여 많은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게 됩니다. 협동조합과 기본소득은 서로의 필요에 부응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일방이 아닌 서로의 필요성이 있을 때 협동조합과 기본소득은 제도적인 보완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입니다.

먼저 <녹색평론>을 통해 클리포드 더글러스라는 기본소득의 창안자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연구는 복지를 염두에 둔 개념이 아니라 순전히 성장을 위한 경제 균형을 중점으로 한 모델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분배가 성장의 동력임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한 기업이나 한 국가는 생산의 총량이 언제나 소비의 총량을 초과합니다. 이를 실증적으로 발견하면서 그는 이 불균형이 경제의 지속성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보다 부족한 소비만큼의 구매력을 국가가 국민들에게 전표를 지급하여 얻을 수 있도록 보상하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소비세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소비를 국가가 보상해 주는 방식입니다.

오늘날이야말로 생산력이 더 이상 증가되지 않는 시대, 즉 성장 없는 시대가 아닙니까? 만성적인 불황의 시대에는 소비가 촉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대기업은 동네 구멍가게까지도 손을 대려고 안간힘을 부립니다.

그렇다면 대기업은 기본소득을 반대할까요? 재벌들이 반대할까요? 그들은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대기업들은 기본소득을 통해 소비를 촉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생산이 소비보다 많을 때, 그 차이가 나는 부분을 소비할 수 있다면 기업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저임금 수준을 넘는 대기업이라면 당연히 모든 노력을 기울여 기본소득을 옹호하겠지요.

따라서 현재의 대기업 위주의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의 도입과 함께 생산력의 기본구조를 함께 바꾸어야 합니다. 점차적으로 협동조합으로 바꾸어 나가야 생산력의 구조를 지금의 방식에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협동조합은 이윤 극대화가 아닌 고용 극대화나 사회서비스 극대화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위주 경제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협동조합의 성장에 따른 기본소득 필요

기본소득이 사회적협동조합의 이러한 생산구조 변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미드도 하였습니다. 미드는 새로운 생산양식 하에서 고용기준으로 국유경제 30%, 시장경제 70%로 나눠지고, 시장경제는 다시 대기업 10%, 협동조합 60%로 나누어져야 하며, 그렇게 될 때 협동조합의 지분 중 50%를 사회 전체의 사회적 소유, 즉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안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과도한 대기업 위주의 지배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성장에 따른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거꾸로 협동조합은 기본소득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상식적인 말로, 협동조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협동조합에서 낮은 임금을 받더라도 헌신적으로 일하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돈을 받는 노동과 자발적인 봉사를 아울러 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더욱 공공성 있는 협동조합의 일들에 전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합원들이 보다 편안한 상태에서 경쟁을 하거나 협동조합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앞에서 말한 대로 협동조합으로 생산양식을 변화하는 데에도 다시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누가 일을 하려 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저는 그러한 생각이 저임금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짐작해 봅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그 말 속에 숨어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0장에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밭 임자는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 각각 일꾼을 불러 저녁 때까지 일을 시키고, 일꾼들 모두에게 노동자 하루 품삯 8만원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지불합니다. 성경에는 ‘하늘나라는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선한 포도밭 주인이 하느님입니다.

사회교리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씀을 빌려 하느님께서 모든 재화의 주인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재화의 소유자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특히 필요한 사람을 위해 재화를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의 논의가 시작되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선하고 인격적이고 하느님 나라를 닮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해 두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방법은 어떠한 차별과 구분도 없이 ‘누구에게나 한 데나리온’이라고, 콕 집어 설명해주는 사려 깊은 친구처럼 분명히 전해 주십니다.

성경의 말씀이 교회의 가르침과 더불어 우리 시대로 흘러들어 협동조합과 기본소득이라는 형태로 논의되고 또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당연하게도 ‘누구에게나 한 데나리온’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면 우리의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동시에 그 결이 훨씬 곱고 선하고 인격적이 될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마태 20,13-15)
 

 
조세종 (디오니시오)
대전 민들레의료생협 이사장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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