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6]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또 내렸다. 처음에는 거부하고 멀리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했던 요나가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이번에는 말씀을 따라 니느웨로 갔다. 그리고 들은대로 이렇게 선포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3,4) 그러나 요나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타락한 악의 도시 니느웨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내심으로는 오히려 듣지 않기를 바랬다. 요나의 마음은 여전히 완고했으며, 악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자신의 의도를 굳게 지키고자 한 셈이다.

그랬는데 이게 웬일인가? 다 다니려면 삼일이나 걸린다던 도시에서 하루 동안만 선교를 했는데도 니느웨 도시 전체가 단식을 선포하고, 왕이나 일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는 회개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왕은 짐승들까지 회개의 표시로 아무 것도 먹지 않도록 명령했다.(3,5-9) 성서는 그 회개의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렸고, 하느님은 그 성읍에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편향된 하느님으로 만드는 인간

그러나 요나는 저주받아야 할 이방의 땅 니느웨가 구원되는 모습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다.(4,1) 신을 모르는 이방인의 땅이 구원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하느님께 분노했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요나. 여기서 요나가 믿는 하느님이 얼마나 편향된 하느님인가를 알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지만, 정죄는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설령 우상과 같은 것에 절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안타깝다면 - 사실 안타까울 일도 아니지만 - ,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는 잘도 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요나는 오늘날의 이른바 ‘열심한’ 신자들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른바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경우가 많은데, 가만 보면 그것은 하느님을 잘 알고 잘 믿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의 고집에 지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요나도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구원받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심한 표현을 두 번이나 하고 있다.(4,3; 4,8) 왜곡된 신관에 근거한 편향된 신앙인 셈이다. 그런 식으로, 요새 식으로 얘기하면, 편향된 하느님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인들이 종종 범하는 이런 왜곡된 사고 방식에 대해, 하느님이 근본적으로 정정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열어주신다.

편향되지 않은 하느님

요나는 니느웨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한국식으로 말하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심산으로 니느웨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지었다. 그 옆에는 사막지역에서 키가 10미터 이상이나 자란다는 아주까리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성서에 의하면 그것은 물론 하느님이 준비해 주신 것이었다. 그늘 밑에서 요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나타나 아주까리를 갉아먹었다. 아주까리는 곧 시들었다. 해가 뜬 뒤에는 뜨거운 열풍이 불었다. 요나는 더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요나는 이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낳겠다며 있는 온갖 불평을 다 늘어놓았다. ‘한 성질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의 내면을 폭로하는 말씀을 이렇게 하신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 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워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 여명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는데,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4,10-11)

하느님은 인간과 정반대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 아이를 개신교 개역성서에는 ‘좌우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번역해놓고 있다. 이것은 선악을 판단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라는 뜻도 되고, 공동번역성서에서처럼, 미숙한 어린아이라는 뜻도 된다. 어떤 번역이든 근본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그런 사람들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무시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그런 이들이기 때문에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인 것이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해서, 실정법을 어겼다고 해서,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이라고 해서 구원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거나, 우상을 숭배한다고 저주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타락한듯한 지역에 산다고 해서 모두 구원과 상관없는 냥,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꿰뚫은 듯 처신하다가 교만에 빠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성서에서는 니느웨가 회개해서 하느님이 재앙을 돌이키신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3,10), 실상 하느님은 어쩌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마음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들, 무지하고 보잘 것 없는 이가 십이만명이나 있는 도시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남의 중병보다 내 감기가 괴로워

햇빛을 가려주던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아까워하던 요나가 수십만명이 죽어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신경이었다. 전혀 가슴아파하지도 않았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애지중지하지만, 제 관심사를 벗어나거나 맘에 안드는 경우는 그들이 다 죽어나가더라도 별 신경 안 쓰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남의 암병보다 나의 감기가 급선무라고나 할까. 내 손톱밑의 가시가 전쟁으로 죽어나가고 있는 수만명의 목숨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요나는 인간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추어준다. 요나서의 서술 방식은 해학적이지만, 인간 마음의 실상을 꿰뚫고 있는 그 내용은 대단히 진지하다.

진정한 기적

주지하다시피, 신약성서에서는 기적을 보여 달라는 제자의 말에 예수가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일차적으로 예수가 자신의 사후 부활을 예견한 것처럼 해석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새로운 의미도 읽힌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민족 중심적 생각과는 달리 하느님의 뜻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기적과 같다는 뜻도 들어있다고 봄직 하다. 하느님은 뭘 모르는 자를 더 사랑하신다는 이런 마음과 자세가 전형적으로 예수에게서 드러났으니 말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이를 더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살았다. 이 정신이 그리스도교를 만든 것이다. 하느님은 죄인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 신앙의 역설일 것이다. 자기 욕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