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소명, 6세기, 모자이크,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라벤나, 이탈리아

신약성경 사도행전 10장에 고르넬리오라고 하는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 이야기가 나온다. 백인대장은 휘하에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이다. 성서에서는 이 사람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며 백성을 구제하는 등,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이 때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나름대로는 율법을 따르면서 유대교적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행동을 일컫는다. 고르넬리오와 베드로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루는 고르넬리오가 제 구시쯤 되었을 때,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시 경에 어떤 환상을 보게 된다.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베드로를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에게 종을 보내 자기 집으로 청하기로 했다.

종들이 도착할 즈음인 이튿날, 마침 베드로도 제 육시, 그러니까 낮 열두시 경에 옥상에서 기도하다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그런 무아경에 빠져든다. 환상 중에 보니 네 귀퉁이가 줄에 매어있는 보자기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땅 짐승, 기어 다니는 벌레들, 새들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베드로가 보기에 그 짐승들은 율법상 부정한 짐승들이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속되고 더러운 것을 먹은 적이 없고 또 먹을 수도 없다고 반문했다. 그러자 뜻밖의 음성이 들려온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된 후에 그릇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베드로는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르넬리오가 보낸 종들이 왔다. 고르넬리오가 베드로를 모셔 말씀을 들을 것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을 하루 밤 묵게 한 다음에 베드로도 그들을 따라 고르넬리오의 집으로 갔다. 고르넬리오를 만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잘 아다시피 유대인은 이방인과 어울리거나 찾아다니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불결하게 여기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부르러 왔을 때에 나는 거절하지 않고 따라온 것입니다.(사도행전 10,28)

그 때까지만 해도 베드로 자신은 깨끗한 선민이고 고르넬리오는 좀 불결한 이방인이지만, 하느님의 음성도 있고 해서 와본 것이라는, 다소 교만한 발언을 한다. 그에 개의치 않고 경건한 고르넬리오는 저간의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준다. 베드로는 고르넬리오가 어떻게 살았으며,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자기를 부르도록 요청하셨는가 하는 저간의 사실을 소상하게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베드로는 결정적인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성서는 그 변화 자체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베드로 개인사에서나, 그리스도교 전체 역사에서나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가 초기 교회의 최고 지도자 내지 전도자로 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사실상 이를 통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사도 10, 34-35)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면 충분하다

자기들의 관례에 따라 이방인을 금기시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그 동안의 태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즉 민족이나 특정 종파 등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는 분이 아니셨다. 하느님은 그 어떤 인간적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종, 교파를 넘어 직접 사람들과 접촉하는 분이셨다.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세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등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그저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베드로의 깨달음이었다.

하느님을 드려워하며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좀 더 해야겠으나, 일단 제도적, 교리적 차원의 ‘그리스도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칼 라너의 유명한 “익명의 그리스도인론”도 딱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의 깨달음이 사실상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기 눈에 죄인으로 간주되던 자도 하느님께서는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깨닫고서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르넬리오는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에 대해 몰랐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믿게 되었다고 성서는 전한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훨씬 전부터 그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이다. 유대교 밖에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이처럼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베드로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하느님은 율법이나 민족 등 사람의 겉모습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절절한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베드로가 이전에 붙들고 있던 레위기 11장의 율법적 규정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회심을 가능하게 한 신관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베드로의 회심 이야기는 교리적, 자기 종교 중심적 사고방식을 넘어설 것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하겠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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