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5 ]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요나 4,11)

구약성서 요나서는 얼핏 쉽고 가벼운 이야기같지만, 진지하게 전체 구조까지 음미하면서 읽다 보면 인간의 한계, 연약함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주는 책이다. 특히 인간이 하느님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나’를 우선시하는 인간

요나서의 주인공 요나는 명색이 예언자였다. 그에게 하느님께서 명령했다: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쳐라”(1,1) 오늘날 이라크 북부지역에 해당하는 니느웨는 한때 앗시리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대도시였다. 다 돌아보려면 3일이나 걸리는 큰 도시였다고 한다.(3,3) 당시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대국이었으니,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앗시리아의 대도시 니느웨는 악의 대명사처럼 비추어지던 곳이었다. 예나 이제나 사람이 많이 몰려 사는 곳은 생존경쟁이 치열해 각박해지고 범죄도 많아지게 마련인가 보다. 성서에서는 대도시 니느웨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미쳤다고 전하고 있으니..... 바로 이 니느웨로 가서 죄악의 실상을 알려 회개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나는 이러한 요청을 은근슬쩍 거부했다. 죄악이 사무친 니느웨는 엄청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을 믿는 백성”을 무너뜨린 “신이 없는 도시”의 상징 니느웨는 천벌을 받아야 할 곳이지 구원을 받아야 할 곳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죄악이 무성한 그곳에 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니느웨의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치고자 했다. 다시스는 오늘날의 스페인에 해당하는 지역이니, 당시 유대인들의 기준으로는 땅 끝 마을, 심정적으로 하느님이 계신 곳과 가장 먼 지역으로 받아들여지던 곳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이 안 들리는 곳,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도망치려 했던 셈이다.

나를 비추어주는 거울

요나는 신을 떠나 바다 건너 다시스로 가다가 엄청난 풍랑을 만났다. 뜻밖의 풍랑인지라 배에 탔던 다른 사람들이 점을 쳐보았다. 그 결과 요나가 풍랑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가 이런 변을 당하느냐? 네 직업, 출생지, 고향, 국적은 무엇이냐?”(1,8) 그 때 요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히브리 사람이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는 자입니다”(1,9)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지만, 가만 보면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요나의 행위에 비추어보면 가관이라 할 만한 답변이다.

직업, 국적, 고향 등을 묻는 간단한 질문에 장황하게 답을 한 것 까지는 좋은데, 앞에서는 자기의 뜻을 앞세워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해놓고는 다른 상황이 되니까 스스로를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 나아가 요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요즘 식으로 하면 신론에 관한 일장 설교를 늘어놓았다. 하느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은 창조주라는 것이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 도망가려던 요나가 상황이 바뀌니까 하느님의 대변자처럼 행세하는 꼴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교회에서 설교하고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나도 따르지 못할 말을 수도 없이 대변하고 다녔을 그 동안의 내 행적을 생각하면 살짝 소름이 돋기도 한다.

희생이 아니라 체념

스스로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발언했던 요나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인지 결국 이렇게 답했다: “풍랑이 일어난 것은 나 때문이니, 나를 바다에 던져 넣으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입니다.”(1,12)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으라는 이 말은 얼핏 이웃을 위한 사랑과 자기희생의 극치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은 사실은 신에 대한 체념이고, 전적으로 홀로 서려는 인간의 오만이었다. 최악의 경우 도망갈 구멍을 한 군데는 남겨두고서, 삶이 극단에 처하면 제 손으로 제 목숨을 결판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아마 요나도 그런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신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나, 결국은 그 신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어쨌든 사람들은 요나 말대로 그를 바다에 던져 넣었고, 바다는 잔잔해졌다.

천지가 하느님의 손바닥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을 결말지으려고 했던 요나의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느님은 그를 죽음에서 건져 올렸다.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킨 뒤 사흘이나 캄캄한 뱃속에 두셨다가 다시 육지에 토해내도록 한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각오하고 결정한 것조차도 하느님께는 결정적인 것이 못 된다는 뜻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선택이란 것이 하느님의 전권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이 사건을 통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요나 이야기의 백미는 하느님의 전권이 주는 현대적인 의미이다. (다음주에 계속)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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