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거야 - 성서와 이웃종교 2]

바울로의 고향인 타르수스에는 로마 시대의 성벽과 성문이 다 부서지고 그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를 '바울로의 문'이라고 부른다.

1세기 그리스도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는 우상과 관련된 것, 즉 이방신이나 우상이라고 생각되던 것에 제물로 드렸던 것을 그리스도인이 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로마 시대에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그 공동체와 해당 신을 재통합시키는 수단이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동제(洞祭)를 지내거나 하면 제사 때 바쳤던 제물은 동네사람들이 다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은 신을 정점으로 해서 그 지역 및 공동체를 통합시키는 수단이었다. 굳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해도, 제물을 나누어 먹는 일이 사람들과의 교제 수단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다소 개화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식사에 자유롭게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공동 식사가 다른 신을 섬기는 행동이라고 간주해 제물 음식을 거부했다. 이때 바울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문제가 나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에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계십니다.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 분을 위해서 있습니다.(1고린 8:4b-6a)

흔히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불교는 부처를, 이슬람은 알라를, 무당은 잡신들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교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여러 신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다신교적 사고를 갖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저제나 이제나 여전하다. 그때 바울로의 일성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일이다: ‘하늘이나 땅에 이런 저런 신들이 많이 있다고 하나, 우리에게 신은 한 분뿐이 아니냐’는 말. 의미인즉, 그 심중까지 적극적으로 해설하건대, 만일 신이 한 분이시라면 그분은 계시지 않은 데가 없을 테고, 그렇다면 어떤 음식이든 그것을 나누는 일 역시 그분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 마당에 우상이랄 것도 뭐 있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다”(로마 11,36)

당연히 그 한 분에 대한 신앙만 분명하면 설령 그것이 어디에 바쳐진 제물이든 좋은 음식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속 좁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우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당연히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물을 나누어 먹고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거나 자신이 더러워졌다는 죄의식을 가진다. 이것을 보고 바울로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설교한다.

어떤 교우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는 그것이 참말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에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렵혀졌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안 먹었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고 먹었다고 해서 더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7-8)

어찌 음식물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고 나가지 못하고가 결정되겠는가! 바울로에 의하면 어떤 신 앞에 바쳐진 제물이든 그것은 먹지 않았다고 손해될 것도 없고 먹었다고 딱히 이로울 것도 없는 정도의 것이다. 음식물 규정에 얽매이는 수준을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인가? 정말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면 그분은 어디에든 계실 테고 그러니 무슨 행위에도 거리낌이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의 정도에도 수준 차이가 엄청나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사람의 근기(根機)가 워낙 다양한 법이다. 어떤 신전에 바쳐진 제물이라도 맛난 음식으로 생각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껄끄러워 손도 못 대는 사람도 있고, 저만 먹지 않으면 되는 것을 남들도 먹지 못하게 하거나 먹는 사람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낮은 근기의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이때 바울로가 던지는 충고 한마디: “다만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1고린 8,9)

자유롭게 행동하되,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지 않게 하는 정도로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약한 이 역시 그리스도가 포용하시려고 하던 자인데 굳이 그 여린 이의 양심에 상처를 입혀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1고린 8,12).  함수, 지수, 로그, 미분적분을 잘한다고 해서 더하기, 빼기밖에 못하는 초등학생 저학년을 그것도 수학이냐며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더하기, 빼기밖에 못하는 초등학생이 지수, 로그, 미적분을 수학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더 황당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수학의 세계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가르침도 늘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교리도 신학도 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방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신자들의 신앙이 성숙될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늘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