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9]

계시는 역사 안에 주어졌다. 따라서 사실적(事實的)이며, 역사적 농도를 지녔다. 계시는 역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놀이에서 확인된다는 말이다. 계시라는 말이 나타나기 전에 놀이가 먼저 발생하였다. 놀이가 있었고, 그것이 언어로 정착하였다.

사적(私的) 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인간 삶의 현장을 벗어나, 영지적(靈知的) 성격의 계시를 말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기적이나 한두 사람의 특수 체험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인지, 혹은 불행을 주는 것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의로운 행위는 그 자체로 족하다. 계시는 그것의 고유한 언어를 갖지 않는다.

예수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지상 생애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라는 개별적 인간 존재의 의미를 넘어서 보편적 의미를 발생시킨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른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 안에 보편적 진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예수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연장하여 예수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도 그분의 말씀으로 전한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안에 그분의 삶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다. 예수는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새로운 청중을 위해 새롭게 말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다(요한 14-16장 참조).

예수라는 개별적이고 역사적 인간 존재를 바탕으로 그분의 보편적 의미를 보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역사학적으로 고증(考證)되는 예수의 모습을 확인해 본다.

시대상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팔레스티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헤로데는 팔레스티나의 부호로서 로마 제국의 정권에 아부하여 팔레스티나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그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33년간 팔레스티나를 다스렸다. 그는 에사오의 후손인 에돔 사람이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가 죽고 팔레스티나는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Herode Archelaos)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헤로데 안티파스(Herode Antipas)가 갈릴래아와 페레아, 헤로데 필리포스(Herode Philipos)가 그 북부 지역을 다스린다. 17년 로마황제는 아르켈라오스의 무능을 탓하여 그를 유배하고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한다.

예수가 탄생한 시기에 예루살렘의 인구는 55,000 내지 90,000명으로 추산된다. 파스카 때는 200,000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인구가 500,000명 정도였고, 팔레스티나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가 2,00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인구가 1,200,000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예루살렘의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그 수치는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 참고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두 도시의 인구가 각각 1,000,000명이었고 안티오키아가 500,000이었다(* A. 레플레, 김윤주 역, <성경과 오늘―돌과 문서가 말한다면>, 분도출판사, 1978 참조)

▲ ‘예루살렘의 전경’, Maxim Vorobiev, 1836년

그 시대 유대 민족을 구성하는 파벌을 보면, 혁명당원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절대적 신정(神政)을 꿈꾸면서 무력 봉기로써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원후 66년에 그들은 실제로 무력 봉기를 주도하였고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Titus)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그들은 완전 섬멸되었다. 그중 일부(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960 명)가 사해 근방에 있는 마사다 요새에 피신하여 항쟁하다가 74년 실바(Silva) 장군에 의해 섬멸되어 ‘마사다의 비극’ 이야기를 남겼다(* 정양모 · 이영헌 공저,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83~85쪽 참조).

바리사이파는 로마 지배에 항쟁은 하지 않으면서, 율법 준수를 철저히 하여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라는 이름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된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에쎄네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와 절연된 독신과 금욕생활을 장려하던 엄격주의자들이다. 스스로 빛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배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66년 혁명당원들이 로마를 거슬러 봉기하였을 때, 초기의 전세(戰勢)가 혁명당원들에게 유리하자 그들에게 가담했다가,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완전 섬멸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두가이라고 불리던 분파가 있었다. 그들은 타협적 보수주의자들이다. 로마 정권에 협력하면서 현상유지를 원하던 사람들이다. 사제장들과 원로회원들이 이 분파에 속하고 또한 팔레스티나의 토호(土豪)들과 귀족들이 여기에 속한다.

사회적 계층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걸식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 앉은뱅이, 나병 환자 등 신체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다. 과부와 고아들도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남의 희사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날품팔이와 노예들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죄인들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율법과 전통을 따르지 못한 이들이다. 그들은 창녀, 세리, 강도, 목자, 고리대금업자, 선원 등 죄스럽거나 부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도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그렇게 열등하게 태어난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존경과 공민권이 거부되었다.

병든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이 있다. 정신질환자와 간질 환자들을 모두 마귀 들린 것으로 생각하던 시대였다. 피부가 불결한 사람은 나병 환자로 취급되었다. 모든 질병과 무질서는 인간 죄의 결과로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되었다.

중류 계급의 사람들이 있다.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의 사람들이다. 목수, 어부, 상점 경영자, 무역업자, 기술자 등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살 수 있는 이들이다.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 있다. 인구에 비해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부호들, 헤로데 왕실 사람들, 십일조로 치부하는 귀족 사제들,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다.

역사적으로 고증되는 예수의 모습

현대인은 확인된 역사적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의 권위 때문에 믿던 시대는 지나갔다. 신약성서는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회상한 것과 더불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기록한 책이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를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이 남긴 문서에서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생존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유대인으로서 기원후 66년의 유대 전쟁에 유대아의 연대장으로 출전하였다가, 조국을 배반하고 연대를 이끌고 투항한 요세푸스는 후에 로마 제국 신민(臣民)으로 귀화하여 로마에서 역사가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유대 고대기>(서기 93년경 저술)라는 책에 “이 시대에 예수라는 한 슬기로운 사람이 생존하였다. 그는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였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자신에게로 끌어 모았다. ……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라 그리스도 교도라 불리는 사람들의 대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A. 레플레, 위의 책, 189쪽 참조)는 기록을 남겼다.

시리아 사람 마라 바르 세라피온은 스토아 철학자인데 흑해 연안 에데싸(오늘날 터키의 우르파)에서 공부하고 있던 자기 아들에게 서기 70년 조금 후에 써 보낸 편지에서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죽였지만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 …… 유대인들은 그들의 현명한 왕을 처형하고 어떠했는가? 그 시대 그들은 그 나라에서 제거되지 않았는가? …… 아테네 사람들은 굶어 죽었다. …… 유대인들은 살육되고 또 자기네들 나라에서 추방되었다.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 있어서는 죽지 않았고 …… 그 현명한 왕도 그가 선교한 새로운 법에 있어서는 죽지 않았다”(* 위의 책 191~192쪽 참조)고 말한다.

이것 외에도 몇 가지의 증언들이 더 있지만, 예수는 목수 직업을 가진 로마 식민지 팔레스티나의 한 젊은이였다. 그분의 생애는 짧았고, 로마 정권의 처형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 대단한 화제가 되지 못하는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성서 밖에서 그분에 대한 기록을 더 찾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가진 신약성서 중에 특히 네 개의 복음서들은 예수의 전기(傳記)를 기록하는 양식의 문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현대인이 생각하는 객관적 전기이기보다는, 예수를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생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예수에 대한 그들의 회상과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들의 실천을 수록한 것이다. 오늘 신문이 사실보도(事實報道)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문서이다.

요한 복음서는 그 말미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20,31)라고 쓴다. 복음서들을 기록한 동기가 역사적 사실보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는 말이다.

예수가 기원전 6년경부터 기원후 30년 4월 7일까지 팔레스티나에 생존하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신학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객관적 전기는 쓸 수 없다. 예수의 용모에 대해서도, 그분이 스스로 어떤 자아의식(自我意識)을 가졌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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