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이번 미국 가톨릭 신학 학회는 ‘회개’를 주제로 마이애미에서 열렸다. 사실, 젊은 학자들에게 학회는 쉬운 자리가 아니다. 학회 내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그들은 노심초사한다. 책에서만 보아 알던 위대한 학자들이 곁에 앉아 있으면,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혹은 ‘어떻게 나를 (좀 인상적으로) 소개하나’ 등등 온갖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다보면, 무슨 이야기를 어떤 맥락해서 해야 이 집단과의 소통이 효율적인지 깨닫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담론과 전체의 담론을 조율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학문이란 것이 결국은 소통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가진 생각을 전체 가톨릭 신학이란 공동체의 틀에서 비추어 보고, 도전하고 도전 받으면서 함께 신학을 하는 것이다.

사실 신학의 세계도 여지없이 권위와 힘의 구도이다. 아직도 백인 남성의 세계관이 신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사실이다. 백인 남성 중심의 권위와 힘을 중심으로 한 담론을 타파하고자 많은 백인 여성 신학자들이 공부했고, 도전했고, 그렇게 담론은 발전되어 왔다. 이제 유색인종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탐구와 도전이 백인 중심의 담론에 도전하고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마이애미 학회는 의미가 있었다. 작년, 나는 아시아신학 팀 대표로 일하면서, 남미신학과 흑인신학 팀 대표들과 모여서 연합 세미나를 준비했다. 가톨릭 신학이 얼마나 유럽 중심의 신학이고, 백인 중심의 신학인지를 담론화하기로 했다. 소리 죽여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는 것, 그리고 그들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최소한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학회가 열리면, 언제나 어색한 모습으로 어쩔 줄 모르며 서성이는 젊을 학자들을 본다. 서툴다는 것이 주는 그런 신선함을 그들이 알 리가 없겠지만, 그들의 쭈뼛대며 서성이는 모습에서 나의 옛 모습을 본다. 엄격하기만 했던 옛 스승도 이제는 스스럼없는 동료가 되어 만나기도 하고, 새로이 같은 길을 가는 길동무를 만나기도 하고, 함께 신학을 하는 우리 공동체 수녀님들과 수다도 떠는 이 공간은 여지없이 내게 신학을 하고자 했던 첫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오신 성모님을 기리며

특히 이 학회가 내 첫 마음을 돌아보는 자리가 되는 것은 마지막으로 모두가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다. 마치 순례를 하는 것처럼, 이 학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 성당에 가서 함께 미사를 드린다. 학문적으로 매우 날카로웠던 신학자들도, 남성 중심의 교회를 조목조목 비판하던 여성신학자들도, 우리는 노예의 후손임을 외치는 흑인 신학자들도, 모두 이 시간만은 두런두런 날씨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해가면서 30분 정도 길을 걸어간다(올해는 조금 멀어서 버스로 갔다). 이 순간 우리는 그저 한 우리의 양떼가 되는 것이다.

▲ 마이애미의 성모당 The National Shrine of Our Lady of Charity의 모습 (사진 제공 / 박정은)
이번에 우리가 함께 간 곳은 쿠바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바로 지척으로 건너다보이는 쿠바를 그리워하며 세운 성모당(The National Shrine of Our Lady of Charity)이다. 구리 광산에서 구리를 캐던 노예들이 배를 타고 마이애미로 건너올 때, 두려움과 굶주림에 떠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 사람들에게 발현하신 자비의 성모님을 기리는 의미로 특별하게 지어진 성전이다. 성전의 지붕은 어머님의 자비와 보호를 상징하는 성모님의 치마폭 모양으로 되어 있고, 성전 안에는 발현하신 성모님의 상과 쿠바인들의 이민 역사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쿠바 출신의 신학자 친구 라몬이 아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사실 마이애미로 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쿠바 출신의 여자와 같이 앉았었다. 그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도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것이 참 신기해 보였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와 영어를 모르는 그녀는 서서히 대화를 시작했는데, 그녀가 처음 꺼낸 말은 “마드레 마이아미, 파트레 쿠바”였고, 손가락으로 지도 위에 그려진 마이애미와 쿠바를 가리켰다. 그리고 “four zero”라고 했다. 그리고 또 그녀는 그 옆을 가리키면서 “도미니칸 리퍼블리크”라고 했다.

내가 해석을 하자면, 자기의 아버지는 아직도 쿠바에 있고, 어머니는 마이애미에 사는데, 사실 쿠바의 아바나와 마이애미는 40분 거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나누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유딧이라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쥬딧(Judith) 말이니?” 하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한국에서 우리도 유딧이라고 하는데, 미국 사람이 아닌 내가 영어식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가 생각하면서.

그녀는 나이에 비해 조금 모자란 듯했지만, 정말 친절하고, 소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긴 비행을 지루함 없이 서로 단어 하나로 소통을 했다. 십자가를 그리며, “교회 다니니?” 하고 물으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간 적이 없다고 했는데,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성호를 그으며 산타 마리아를 외쳤다.

자애의 하느님과 고통 받는 사람을 섬기는 신학

▲ 쿠바인들의 이민 역사를 담은 마이애미 성모당 안의 벽화 (사진 제공 / 박정은)
그날 미사에서 크리올어(creole, 아이티의 원주민 언어와 식민지배국인 프랑스의 언어가 합쳐진 언어)로 된 슬프면서도 경쾌한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쿠바인들의 이민 역사가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 식민지배와 어우러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언제나 나타나시는 성모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멕시코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그렇고, 아르헨티나의 루앙 성모님이 그러하다. 어쩌면, 신앙이란 결국 가난한 이에게 다가오시는 신의 자비에 무릎 꿇는 그런 행위가 아닐까? 우리가 하는 신학이 이런 자애의 신을, 그리고 고통 받는 인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쓰레기인 것이다.

그러면서 비행기에서 만났던 유딧을 생각했다. 손톱 매니큐어 칠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자신의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던, 그리고 쿠바인의 이민의 깊은 아픔을 기꺼이 열어 보여주었던 유딧. 그녀가 이번 학회로 나를 인도하신, 그리고 진정한 신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진실한 인간의 삶 속에서 우러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 마이애미의 성모였음을 깨달았다. <노틀담의 꼽추>의 원제는 ‘Notre Dame de Paris, 파리의 성모님’이다. 빅토르 위고가 생각한 파리의 성모가 가난하고 아름다운 집시 이스메랄다인 것처럼, 나에게 Notre Dame de Miami, 즉 마이애미의 성모는 못 배웠고 조금 모자란 듯해도 정답고, 사랑스럽게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던 유딧인 것 같다.

미사를 드리면서 왠지 학회에서 발표한 내 논문이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내가 한 연구에 사람, 그것도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깃들어 있었나 생각해 보니, 연민은커녕 그저 서슬 푸르게 서구 남성주의, 그리고 백인 여성주의 일색의 담론과 싸우느라 자구(字句)에만 골몰했다.

이번 학회의 주제가 ‘회개’인데, 이렇게 또 나는 내가 처음 신학을 하고자 할 때, 내 마음을 이끌어 주었던, 가난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뜨거운 열망을 느꼈다. 그래서 은혜로운 자비의 성모당에서 인간의 아픔을 보듬는 따스하고 진실한 신학을 하게 해 달라고, 성모님께 기도했다. 내 길의 인도자이신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내가 하는 신학이 사람을 담고, 참 사람을 닮도록 이끌어달라고 기도했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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