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하면, 그건 무슨 뜻일까?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영화 ‘사랑은 강물처럼’에서의 한 대사처럼,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한 인간의 내면은 우주와 같다. 성서를 읽다보면,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다윗이다. 이스라엘의 시들을 모아 놓은 시편의 시들 중에 많은 시는 다윗이 지었다고 하며, 그의 삶은 신앙의 모델로 자주 언급된다. 그의 삶은 여전히 찬란하며 동시에 어둡고, ‘갑’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하다. 그래서 그는 신비하다.

마냥 좋아하기만은 어려운 다윗이라는 사람

▲ 렘브란트의 작품 ‘다윗과 우리야’(1665년)
그런데 약간 삐딱한 눈으로 성서를 읽어보면, 그는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신의 왕조를 이룬, 기가 막히게 정치적인 사람이다. (내가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할 때는, 권력을 잡으려고 온갖 술수를 쓰는 천박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나의 편협함을 인정한다.) 다윗은 성서라는 텍스트도 결국 힘 있는 자, 역사의 승자를 위해 쓴 것이라는 현대 해석적 비판의 대상이다. 그래서 여성주의 비평이나 이념 비평에서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도 다윗이다.

특히 다윗과 여성의 관계를 보면, 그는 솔직히 질이 좋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잘 알다시피, 그는 충실한 그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와 정을 통하고, 임신한 사실을 은폐하려고 온갖 일을 꾸미다 결국 우리야를 죽이게 한다. 물론 성서는 밧 세바가 무엇을 느꼈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다윗을 좋아하기는 했는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밧 세바는 끝까지 정치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등극하도록 다윗에게 입김을 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극적인 것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라고 하겠다. 성서는 철저히 승자인 다윗의 편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 그가 야훼의 눈 밖에 났다. 싸움 전에 하느님께 제사들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아 조바심 끝에 그만 자신이 제사를 드리고 출전한 것이 그 이유이다. 다른 하나는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을 모두 불살라야 하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좀 남겨둔 아주 인간적인 이유다. 그로부터 모든 상황은 사울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간다. 결국 하느님의 눈 밖에 난 자의 처절한 최후만 남는다.

그런데 무엇보다 사울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질투다. 질투는 가진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아들의 친구인 보잘 것 없는 궁정악사였던 다윗, 그러나 그가 자신보다도 더 위대한 전사라는 말에 그만 심기가 편하지 않다. 더구나 그의 아들 요나탄과 다윗의 우정은 더욱 사울을 괴롭힌다. 그의 아들마저도, 혹시 다윗에게 자리를 빼앗길세라 노심초사하는 자기와 한 편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다윗과 한 편이 되어 그를 싸고돈다. 그런데 이 우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어 있는 왕자 요나탄이,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우정은 오직 요나탄이 다윗에게 바치는 우정이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잘 하는 불평 중 하나가 “불공평해(It is unfair)”다. 그럼 그에 대한 응수가 “인생은 불공평한 거야(Life is unfair)”이다. 성서에서 위인을 그릴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야훼께서 예쁘게 보셨다”인데, 그 예쁘게 보인다는 것은 결국 역사의 승리자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그럼 무엇이 그를 야훼의 마음에 들게 하였을까? 아니, 다시 말해 무엇이 그를 최후의 승자가 되게 하였을까? 내가 보기에 다윗은 전체 그림을 잘 보는 사람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힘이 있어도, 힘없을 때 받은 모욕을 당장 갚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왕이 사울이었고,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반기를 들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내게 성서가 매력적인 텍스트인 것은 다윗을 매끄럽고 완벽하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곳곳에서 모순적인 모습과 그의 어두운 면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울이 하느님의 눈 밖에 났듯이 다윗도 하느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했는데, 병적 조사가 그 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그는 사울보다 훨씬 프로답게 회개한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나는 솔직히 이렇게 공식처럼 회개를 잘 하는 사람이 좀 두렵다. 너무 매끄럽고 드라마틱해서.

성서는 또한 다윗을 좋아하지 않은 적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쫒겨갈 때, 사울의 부족의 한 사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사울 일족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놈”이라며 욕을 하고 돌팔매질을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다윗은 최고로 겸손하다. 자기 편을 들어 펄펄 뛰는 신하에게 이건 자신이 받을 몫이라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받겠다고까지 한다(2사무 16). 여기까지 보면 무지 감동을 준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넘겨주는 장면에서, 솔로몬이 처단해야 할 인물들을 죽 나열하는데,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요압 장군과 함께 시므이를 죽이라는 대목이 나온다(1열왕 2).

다윗의 삶을 생각하며 발견하는 나의 어두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말고 백성들이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다윗은 내가 보기에 마키아벨리보다도 한 수 위여서 마치 신앙의 언어로 자신을 무장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이 예쁘게 보시고 내 편이 되셨다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야 하는 정당성을 피력하는 것 같다. 물론 성서 작가의 붓을 빌어.

그런데 내가 철저히 사울 중심으로 성서를 읽다가도 한 부분, 정말 다윗이란 인간에게 매료되는 부분은, 밧 세바와의 불륜으로 나은 아기가 죽어갈 때, 울고 단식하며 기도하다가, 아기가 죽고 나자 훌훌 털고 식사를 하는 일화다.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랄까? 최선을 다해 회심하고 빌어보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참 쿨하게 받아들인다.

방학을 맞은 첫 주말의 아침, 오랜만에 한가롭게 식탁에 앉아 다윗의 삶을 생각한다. 그는 승자인가? 아니면 운명에 휘말려 정신없이 달려가야 했던 외로운 인간이었을까? 그래도 신 앞에 벌거벗을 수 있었다면, 그는 용감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나중에 한 생을 살고, 그처럼 나도 하나도 숨김없이 하느님과 다 셈을 치른 상태라면, 나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다윗의 다 드러난 치사하고 비열한 인격을 보면서 나는 내 안에 잘 접어 숨겨둔 나의 어두움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다윗이란 캐릭터는 내게 오늘 이 시간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다 드러내고 서는 연습을 하라고 나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과 화해하는 방법이고, 나와 화해하는 길이기에 말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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