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했다.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전율이 아마도 섬세한 시인에게는 잔인할 만큼의 아픔으로 다가온 걸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봄의 노래는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하는 노래인데, 목련꽃이 핀 세상은 정말 아련한 그리움과 새 생명의 신비를 떠오르게 한다. 이런 때 우리는 부활 시기를 지내며 부활 신앙, 즉 새 생명의 의미를 묵상한다.

하지만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복음서를 보면, 부활 사화는 가장 끄트머리에 조금 나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는 성탄의 이야기,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 또 십자가 상에서 수난하시는 이야기들은 익히 들어서 잘 알지만(이 이야기는 복음서의 반을 넘게 차지한다), 부활의 이야기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마르코 복음서 같은 경우는 겨우 부활을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편집 전승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원래 마르코 복음서에는 부활 이야기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로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부활 사화는 복음서를 쓴 저자의 삶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시점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내가 최근에 하고 있는 체험은 그리 잘 정돈되어 나오지 않는다. 사실 복음서가 쓰인 시점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부활을 체험한 시점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결국 부활의 체험을 가지고 예수님의 삶을 비추어 보며 기술해 나간 것이다. 또한 그분의 삶은 복음서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고유한 삶에 따라 해석되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작성한, 혹은 각 복음의 공동체들은 부활을 체험하고, 그 부활 신앙에 입각해서 예수 체험을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 사화를 만나는 그 시점은 거의 복음사가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 근처 언저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 사화는 다른 이야기들처럼 확실한 구조나 의미를 갖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무언가 신비롭고, 또 경이로운 담화들이며, 열려있는 초대의 공간이다. 행간의 의미 속에서 우리는 또 부활 신앙의 핵심을 만나도록 초대받는다.

그럼 복음서의 부활 사화가 전하는 부활한 새 생명의 핵심은 무엇일까? 부활 사화에서 비쳐지는 새 새명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자.

▲ “예수님도 가장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상처다. 그런데 사실 남에게 상처를 내보이는 것은 보통 용기 있는 일이 아니다. 나를 우습게 만드는 것도 같고, 치부를 보이는 것 같으니까.” 그림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부활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

우리의 안부를 묻고 축복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는 예수님

첫째, 복음 사화를 보면 꼭꼭 잠근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 두려움에 떨고 있고 있는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의 만남은 참으로 미묘했을 것 같다. 반갑고 기쁘지만, 한편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자리가 아닐까? 내가 제자라면, 예수님이 수난 받는 동안 도망친 나의 ‘찌질한’ 모습이 미안하고, 부끄러울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그 일은 이제 괜찮다”거나, 혹은 “그때 왜 그랬냐” 하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샬롬”이라고 하신다. “샬롬”이란 이 히브리어는 “평화, 평안, 안녕”을 뜻하는 말로, 의문과 기원의 뜻을 함께 지닌다. 그러니까 부활한 예수님은 “평안하냐”고 묻거나, 혹은 “평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좀 더 우리말로 의역해 보면 “괜찮니?” 혹은 “괜찮아”가 될 것 같다. 그만큼 부활은 과거 나의 부족과 잘못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새로운 빛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그런 초대인 것이다.

가끔 나는 내가 만든 마음의 빗장이 좀처럼 열리지 않음을 체험한다. 누군가를 절대 용서하기 싫을 때, 혹은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아는데도 용서를 청하기 싫어 마음을 꼭꼭 잠그고 숨어있을 때, 그저 내 마음을 열고 다가와 괜찮냐 물어 주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 그것이 부활의 신앙을 사는 것일 듯하다.

둘째, 모든 부활 사화에서 공통적으로 그리는 모습은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형태든 상처를 지니고 산다. 내가 십여 년 이상 영적 지도를 하면서, 참 놀랍기도 하고 가슴 아픈 점은 한국인들이 가진 상처 중 가장 공통적인 것이 가난이거나 가난에서 오는 경험이란 점이다. 모두가 가난했을 때는 서로 비교하는 것이 적었는데,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갑자기 빈부 격차가 심해졌고, 교회는 가난의 영성이나 물질에 대한 영적인 지침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면 괜히 주눅들기도 하고, 수도자나 성직자조차 경제적으로 부유한 신자를 더 선호하는 것 같은 인상도 받으며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인 가난에 대한 갈등이 영적인 상처로 깊이 남은 것 같다.

“너의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나를 언제나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 상처도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왠지 그런 사람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아 나는 다가가거나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한번쯤은 세상이 참 힘들다고 울어 본 사람, 심한 두려움과 고통으로 밤을 지새워 본 사람에게서만 나는 사람 냄새가 있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을 헤쳐 오면서, 모든 인간의 아픔과 상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아픈 사람을 다독여주는 따스함이 묻어난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가장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상처다. 그런데 사실 남에게 상처를 내보이는 것은 보통 용기 있는 일이 아니다. 나를 우습게 만드는 것도 같고, 치부를 보이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상처는 알고 보면,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며 각자의 콤플렉스는 그를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것 같다. 나의 부서짐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빛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서짐은 남을 위로하고, 나는 또 누군가의 부서짐으로 깊은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혹시 부활의 신비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부활 사화에서 예수님은 둘 이상 함께 모여 있는 제자들의 공동체에 모습을 나타내신다. 경전화된 복음은 아니지만 ‘토마스 복음’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한 제자가 “주님, 저희가 언제 늘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겠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너희의 알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나를 언제나 보게 될 것이다”하고 대답하신다.

자기의 상처와 깊이 화해한 마음처럼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편안하게 내보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공동체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일은 일상의 순간들처럼 흔하며, 또한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나의 상처를 자연스레 남에게 보이는 일은 활짝 핀 목련송이처럼 아름다운 일일 것이나, 그 꽃을 피우는 나무의 고통은 잔인할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부활을 사는 일은 치열하되, 그 새 생명은 찬란한 일일 것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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