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대한문 앞 쌍용차 미사, 장동훈 신부 강론

8일부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자들을 위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지난 9일 미사의 장동훈 신부(인천교구) 강론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이 있다.
그 왕들이 바윗덩어리들을 끌어왔던가?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누가 그 도시를 재건했던가?”

▲ 장동훈 신부 (사진 제공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에 맞서 길바닥에서 싸운 지 이번 주면 꼬박 6년이 되는 콜트 콜텍 노동자들.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동영상의 첫 장면에 음울하게 올라오는 자막입니다. 이 세상 모든 도성이 그러하듯 일하는 자들의 땀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얄궂게도 그들의 이름이 아닌 그들을 부렸던 황제나 왕 따위의 고매한 이름들만 기억합니다. 역사는 늘 승자들의 차지였고 무명씨들은 그저 몸을 부려 생명을 이어갔을 뿐이지요.

역사의 잔인함보다 저를 슬프게 했던 것은 화면 속에 나오는 벗들의 얼굴이었습니다. 화면 속, 아직은 생기가 있는 30대 청년은 사십 줄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되었고 40대의 중년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얼굴에 담았습니다. 저들에게도 찬란한 젊음이 있었다는 새삼스런 생각과 함께 마음을 붙드는 것은 그들이 인내한 그 세월의 깊이와 농도입니다. 누가 그들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습니다. 거역할 수 없게 밀어닥쳐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나를 휘몰아가는 것들 말입니다. ‘운명’이라고 부르는 그 저항할 수 없는 것은 갯바위에 서있는 어부를 집어삼키는 성난 파도를 싣고 온 폭풍 같이 격렬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게 일순간 나는 그 회오리의 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동영상 재생이 모두 끝나고 껌뻑대는 화면을 바라보며 아득하게 들던 생각은 그들을 휘몰아친 폭풍의 시간과 지금 그들이 당도한 물가입니다. 그 물가에서 밤사이 그들을 쉴 사이 없이 몰아치던 망망대해를 향해 던지는 그들의 눈매를 그려봅니다. 허탈함일까, 억울함일까, 그도 아니면 다시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어 생을 살아갈 희망일까. 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를 찾아온 고매한 이를 기억합니다. 식자이고 존경받는 유대인 니코데모는 사위를 가늠하기 힘든 밤을 틈타 예수를 찾아옵니다. 진리를 찾는 이의 간절한 마음이 밤이라는 시간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예수는 그에게 그저 바람 같은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성령의 바람 말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아니 저항해도 어쩔 수 없이 나를 집어삼키는 그 바람에 차라리 몸을 맡기라 이르는 듯합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냐는 니코데모의 반문처럼 우리 주위에 분명 존재하지만 확인 할 수 없고 움켜쥘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랑, 희망, 정의, 온화, 겸손, 평등과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희망이 어디 있냐고 물을 때 ‘여기 있다’고 꺼내 보일 수 없지만 그 허깨비 같은 것이 분명 존재함을 우리는 누구나 압니다.

사람이니 압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색깔도 질량도 무게도 없지만 분명 내 뺨을 스쳐가는 바람으로 알고, 볕이 좋은 날 내다놓은 빨래줄 위 옷가지들의 펄럭임으로 압니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홑겹 비닐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울 길 위의 벗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압니다.

6년 전의 어느 날과 오늘의 그들을 훑고 지나가는 것은 생물학적인 노화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훑고 지나간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고 이제는 변해버린 인생 항로입니다. 어쩌면 절단 난 인생, 저주받은 삶, 개들이 상처를 핥아먹는 처참한 욥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들을 실어 날라 온 바람이, 폭풍이 꼭 그런 절단난 것들뿐일까요?

▲ 8일부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자들을 위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유롭기 위해 자신을 가둔 사람들과 만나며

얼마 전 엄동설한 새벽 어둠을 뚫고 합판 하나 등에 이고 높은 곳을 기어올라 하늘에 집을 지은 벗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세 사내 중 한 사내는 주위의 성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송전탑의 하늘집에는 덥수룩한 머리의 두 사내만 있었습니다. 한 사내는 북받쳐 울고 웃었습니다. 다른 사내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었지만 분명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이야기 내내 울던 사내는 힘들고 고단한 시간이지만 여전히 삶의 격정을 품은 생기가 보였지만 다른 사내는 달랐습니다. 마치 힘차게 뛰던 맥박이 정지한 후, 삐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일직선의 경적 같은 무념, 무욕의 그가 보였습니다.

자유롭기 위해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하늘에 가둔 이들, 그들을 만나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의 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복잡했습니다. 울던 사내와 온갖 세상의 욕망을 잃어버린 듯 한곳만을 응시하던 그 말없던 사내가 자꾸 저를 붙들었습니다. 그가 걱정됐습니다. 그를 마냥 저리 둘 수 없겠다는 생각이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 무욕의 사내를 잃어버릴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걱정이 폭풍처럼 저를 밀어냈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법. 그 사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찾아가지만 않았다면, 제 속을 온통 채운 그 불길한 마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 같은 ‘염려’가
우리를 여기로 몰고 왔습니다

스물네 분의 넋을 기리던 분향소가 쓰레기마냥 철거됐습니다. 차라리 그 광경을 보지 않고, 듣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이 휘몰아치는 운명처럼, 불고 싶은 모양으로 어디서 와서 어리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염려’함이 우리를 이리 몰고 왔습니다.

염려가 무엇인지, 타인의 삶을 걱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따듯한 방안과 견고한 벽돌집이 일순간 불편한 자리가 되는 알 수 없는 심정의 변화가 무엇인지 콕 집어 말해줄 수도, 꺼내 보일 수도 없지만, 분명 그것들이 우리를 이 자리에 오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운명처럼 거역할 수 없는 것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성령처럼 바람 같은 것입니다. 그 바람에 우리를 기꺼이 맡긴 것입니다.

그것은 니코데모의 고매한 ‘식자’의 마음이 아닌 예수의 살결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의 철없는 마음입니다. 예수의 눈물 많은 마음입니다. 그 바람이 다시 휘몰아치길 기도합니다. 다시 휘몰아쳐 무욕의 사내에게 다시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주고, 땀 흘려 일할 억울한 손길들에게 일터를 선사하며, 바윗덩어리를 굴려 도성을 지은 이들에게 저 높고 고귀한 ‘상전’들이 머리 조아리게 할 거역할 수 없는 폭풍으로, 거대한 폭풍으로 덮쳐오길 기도합니다.

사진 제공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그 거역할 수 없는 바람에 몸을 실은 이들입니다. 기꺼이 그 폭풍우에 휘말리길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처럼 저 하늘 위 무욕의 사내도, 이제는 걸어온 길을 가늠하기도 힘들 만큼 긴 세월을 인내한 벗들에게도, 홑겹 비닐에 밤을 지새우는 동지들에게도, 이 시간 골방에서 삶의 경계를 희미하게 넘나드는 친구에게도 희망으로 몰아치길 기도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그 바람에 순응했듯 우리도, 그 사내도, 벗들도, 동지도, 친구도 모두 그 희망의 바람에 다시 춤추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 이 세상의 욕망을 다 내려놓은 듯 보였던 저 하늘집의 사내에게서 반가운 편지가 왔습니다. 한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까치가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쌍이 보금자리를 만드느라 바쁩니다. 집짓다 천막으로 떨어진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여갑니다.

송전탑 어디를 둘러봐도 까치집은 없는데 이놈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정들고 의사소통이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습니다. 혼자가 아님을 가르쳐 주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모든 걸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꿔낼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요? 혹시 억울한 영혼들의 환생은 아닐까요?

소통을 하다보면 답도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지랄같은 비바람도 지나갔습니다. 함께 울어준 하늘은 눈물 자욱을 지워 맑고 푸릅니다. 또 밤이 되면 비바람에 단련된 밝은 달님이 고단한 민초들의 말벗도 되어 주겠지요.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고 더는 죽지 말자며 설치한 작은 분향소마저 짓밟은 잔혹함도 보겠지요. 유치장이 뭐가 좋다고 4일에 들어가 5일에 나오고, 6일에 또 들어가야 하는 김정우 지부장의 분노와 절규도 보았겠지요.

해고자로 노숙하며 보냈던 4년 동안 우리는 온갖 탄압과 고통을 견뎌왔습니다. 비닐 한 장으로 또 다시 시작하지만 마음만은 이미 온돌방이 되고 있습니다. 넘치도록 주시는 사랑과 연대가 시대의 아픔, 쌍용차 노동자의 아픔을 치유하고 인간 존엄을 발효시켜 어느 봄꽃보다 아름답게 피고 있듯이, 우렁찬 까치의 일성에 일요일 아침 기운을 차려봅니다.” (쌍용자동차 한상균 전 지부장)

장동훈 신부 (빈첸시오, 인천교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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