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최근 <두려움에 관한 문화사적인 연구>(Fear: A Cultural History)라는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20세기 영국과 미국 사회를 지배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는데, 두려움은 그 사회구조를 반영하며, 또 사회구조는 사람들이 가지는 두려움을 반영하며 형성되어 간다는 논지였다. 그 중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죽음과 늙는 것에 관한 부분이다.

어느 시기든, 어떤 사회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은 모든 종교 의례에 반영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대인들의 죽음에 관한 공포는 중세 사람들이 가졌던, 죽음 후에 맞을 신 앞에서의 심판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이다. 특히 암 환자의 경우 투병 중 심한 고통을 겪는데, 거의 모든 환자들이 죽음 자체보다도 그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죽음 뒤에 맞을 영원한 지옥의 심판이란 두려움이 도덕적 구속력을 가지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죽는 것 자체는 괜찮아. 아픈 게 무섭지”라는 말을 많이들 하는 것 같다.

또 현재 가장 큰 죽음의 두려움은 자연재해와 핵으로 인한 것인데, 특히 이 두려움은 근거 없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현실적이다. 그렇기에 이 경우 더 두려운 것은 인간의 부인이나 무감각일지도 모르겠다. 핵의 위협 앞에 선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 혹은 무감각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잣대가 될 것 같다. 또한, 이 두려움에 대한 창의적인 반응은 우리의 삶을 변하게 할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더 심각한 늙음에 대한 두려움

다른 한 가지 두드러진 두려움은 늙음에 대한 것이다.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20세기 초에는 없던 공포로, 20세기 후반에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현재 노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은 베이비부머(Baby boomer)들로서,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 세대의 특징은 모든 것을 거침없이 살아온 세대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체험하지 않았고, 온갖 진보적인 행동을 통해 변화를 체험한, 어찌 보면 가장 행복한 세대다. 성의 혁명을 통해 자아실현을 꽤 했고, 페미니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히피 등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고 투쟁한 멋있는 세대다. 교회로 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새로운 진보 신학을 구축한 세대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늙는 것이다. 항상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왔던 세대이기에, 다음 세대에게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베이비부머라는 이름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들의 수는 무척 많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키 광고가 이야기하듯 “나는 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는 벽을 쌓은 일이기에 두려운 것이다. 이번 봄 방학에 내가 학생들과 한 여행에 따라나선 수녀님 한 분은 지금 78세로 앞이 잘 안 보이고, 균형감이 부족해서 쉽게 넘어진다. 더구나 귀도 잘 안 들린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셨는데 퇴직한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교수’로 소개한다.

미국의 ‘친절한’ 문화는 그저 눈알만 굴릴 뿐, 그분에게 “너는 이제 일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을 돌볼 수 없다”는 나의 말에 핏대를 세우며, 자신은 할 일이 있다면서 굳이 필드트립을 따라나선 것이다. 피정이나 다른 학교 행사에 이분을 모시고 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수고를 감수하겠지만, 학생들을 데리고 노동하러 가는 이 여행에서는 정말 ‘짐’스러웠다. 그곳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그분은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정말 애를 썼는데, 그게 보는 나를 안쓰럽다 못해 슬프게 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하도록 만드는 걸까?

나의 경험을 듣던 이란인 심리학자 친구가 미국 문화에는 “한가하게 인생을 관조하는 노년”과 같은 어휘가 아예 없다며, 언어가 없다는 것은 그런 사고의 공간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년을 맞는 비애나 기쁨, 의미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자기 나라에는 이런 노년기의 의미를 가르치는 이야기가 있다며 들려주었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떤 마을에 한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어찌나 성실하던지 아침이면 일어나 일을 하고, 정오에는 사원에 가서 기도하고, 바로 일하러 나가 해질녘에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내를 부러워했고, 그 자녀들은 모두 행복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놀라 그 집에 가보니, 그토록 부지런하던 그녀의 남편이 “나는 늙었다”고 선포하며,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일하러 가지 않고, 손에 구슬(묵주와 비슷한 이슬람의 기도 도구)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아, 그가 늙었구나!” 하며 조용히 돌아갔고, 그날로 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기도했으며, 그의 아이들이 아버지처럼 일을 부지런히 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최소한 미국 사회의 경우, 늙음에 대한 두려움은 노인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어떤 어휘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저것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는 예이츠의 유명한 싯구처럼 현대 사회는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그렇기에 미국의 이 세대는 죽는 순간까지 무언가를 하려고 바둥거리는 것이다.

이번 4월말에 팔순이 되시는,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어른 한 분이 있다. 그분은 노익장을 과시하는 동료 학자들이 “너는 요즘 뭐하냐?”(What are you doing these days?)고 물을 때마다 “가능한 한 조금만 한다”(I do as little as possible whatever it is.)고 동문서답을 한다.

한국도 노인 인구가 늘어나고,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두려움은 경제적인 데서 오는 것 같다. 윗세대를 돌보느라, 자식들에게 최고의 것을 내주느라 자신들의 몫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긴 세월을 어찌 보내나 하는 두려움이다. 사회는 노인 복지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할 것이고, 또 늙어가는 우리는 형편에 맞게 자신의 삶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뛰어들 때가 있으면 그만둘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다는 전도서 말씀처럼, 그 때를 잘 아는 지혜와, 때에 맞춰 행동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것 같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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