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 네 농민들의 부활 이야기
"끝까지 농민으로서 세상과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엊그제 잠깐 추워지더니, 그새 땅이 얼었더라고”
“잘못하면 파종할 감자 다 얼릴 뻔 했다니까”

두물머리 농민들을 만나자마자 농사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빼곡했던 비닐하우스도, 시설물도 모두 철거됐지만, 남아있는 농토를 쉼 없이 일구고 있는 그들은 갈 곳 없는 농부다.

2012년 9월, 두물머리에 생태체험학습장이 들어서기로 결정되고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생태체험학습장에 농지를 만들어달라고 끝까지 요구한 덕분에, 공동 경작지가 들어설 예정이지만, 네 명의 농부는 개인 경작지를 원한 것이 아니라며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준비하고 있다. 두물머리를 지키기 위한 만 4년의 싸움, 사순과 같은 시간을 지나온 그들이 준비하는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

▲ 두물머리에는 두 명의 농민이 새로 탄생하게 됐다. 방춘배 씨(맨 왼쪽)와 김유 씨(맨 오른쪽)는 귀농을 준비중이다. 네 명의 농민은 이들의 멘토를 자청했다.©정현진 기자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에도 서규섭(욥) 씨의 전화기가 분주히 울린다. 농사지을 땅과 집을 알아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최요왕(요한) 씨는 다행히 두물머리 인근에 자리를 잡게 됐고, 서규섭 씨도 여주 인근에 새 농토를 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임인환(프란치스코) 씨와 김병인(이시도로) 씨는 아직 농지를 물색 중이다. 원래 네 농부의 바람은 두물머리 인근에 공동 경작지를 마련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임인환 씨는 “지금 당장 땅을 구해도 상반기 농사는 늦었다. 더 늦게 되면 내년부터나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자기한테 맞는 땅을 찾아야 하는 과정이니, 마음은 급하지만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래도 두물머리 하천 부지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고 전했다.

두물머리에 남게 된 최요왕 씨는 “땅도 좋고, 지하수 덕분에 겨울농사를 지을 수 있고, 무엇보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짓는다는 팔당 지역의 전통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최요왕 씨는 혼자 남게 되는 것은 아니다. 팔당생명살림 사무국장으로 두물머리 싸움에 참여했던 방춘배 국장과 환경단체 활동가로 두물머리에 들어왔던 김유 씨가 두물머리 귀농을 결정했다. 이들은 “원래 귀농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두물머리 싸움이 그 시점을 앞당기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면서, 두물머리 농민들을 멘토 삼아 부지런히 농부 수업 중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농사꾼이 농사를 지어야지. 제 땅 한평 없이 농사도 못지으면서 무슨 농민이야. 무슨 유명 인사들처럼 자꾸 돌아다니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고...”

최요왕 씨가 문득 아픈 말 한마디를 던졌다. 두물머리 싸움을 할 때도, 농사짓자고 하는 싸움인데 막상 농사일에 충실할 수 없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두물머리가 해결된 뒤에도 세상의 아픈 곳이 눈에 밟혀 이곳저곳 힘을 보태려고 찾아다니지만, 정작 농부로서 마음 편히 디딜 땅이 없다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다시 처음처럼 귀농을 준비하는 것 같다”

네 농부가 똑같이 고백한다. 이제 두물머리 공동체를 떠나면 작물의 종류도 달라질 것이고 새로운 소비자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의 농업 현실이 점점 열악해져 오히려 처음보다 힘들 것 같다는 말끝에, “농사꾼이 유목민처럼 돌아다니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한탄한다.

▲ 지난 3월 22일 두물머리 옛 미사터 앞에서 조해붕 신부의 주례로 봉헌된 십자가의 길과 미사. ©정현진 기자

두물머리 싸움이 가져온 변화들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귀농한 이들은 10여년의 세월을 함께 겪었다. 귀농 이후 또는 생애 최초의 큰 사건이라고 말하는 두물머리 싸움이 이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김병인 씨는 “두물머리 싸움을 하는 동안, 태어나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육군 대위로 예편해 귀농한 김병인 씨는 국가관과 인생관이 전복되는 시기를 겪었다고 했다. 국가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고 믿었던 그는 이번 일로 국가의 폭력성을 단단히 경험했지만, 함께 연대한 사람들을 통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재산이나 권력의 크기를 다투고 계산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가진 만큼 내어놓고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모진 싸움을 하는 중에도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모르던 세상, 진실, 사람들을 만나 깨달은 것이 정말 많다. 비록 군 시절의 동기들은 많이 잃었지만...”

김병인 씨는 “유기농을 고집하면서 옮겨갈 곳이 마땅치 않다. 새로 빚을 지면 대략 80살까지 갚아나가야 할 것이다”라면서, “그런데 다른 식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 땅을 내 땅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힘든 것이다. 할 수 있을 만큼 얻어서, 최선으로 농사짓고, 다 갚지 못하면 땅을 내놓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최요왕 씨는 “두물머리 싸움이 농사와 삶에 대해 제대로 고민할 기회를 줬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새로 귀농하는 느낌이다. 또 개인적인 삶 외에 농업의 구조 문제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도 새로운 고민거리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의 일들을 새로운 도전으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이제는 진짜 농사꾼으로 차분하고 진지하게 임할 것”이라고 전했다.

▲ 3월 25일 평택 쌍용자동차 송전탑 농성장 앞에서 봉헌된 미사에 참여한 농민들과 두물머리 지킴이들. ©정현진 기자

“두물머리 싸움, 삶의 총체적 전환기이자 가장 행복한 시간”
“연대의 마음 끝까지 간직하면서 모든 것 나누며 살아갈 것”

“처음 귀농을 할때는 혼자였고, 홀가분하게 시작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가족에 대한 책임도 있고, 농사에 대해서도 더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됐어요. 지난 5년 동안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더 철저하게 농사꾼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새로운 어려움이 생기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몫이고 당장 내일부터 살아가야 할 나의 현실이니까요. 제대로 고민하고 점검하면서 잘 이겨내야겠죠”(서규섭 농민)

임인환 씨는 “나는 두물머리 싸움으로 사람 됐다고 여긴다”면서, “비록 지금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그렇게 했을 것이고, 우리 모두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연대’라는 말을 꺼내면서 그 많은 이들의 마음이 떠오른 듯, 눈물을 보였다.

“연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어느 현장이든 가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두물머리가 그렇게 이겼으니까”라고 말하면서, “살면서 만나는 문제에 대해 함께 위로하고 맞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농민으로 살아갈 것이니, 농사를 통해 모든 것을 나누면서 살아갈 것이다. 벅차겠지만 한고비, 한고비 그렇게 넘겨갈 것”이라고 말했다.

▲ "만나서 하나되어 흐르나니. 물과 바람과 해와 달과 농부아 흙이 아우러 하나되어 살게 내버려 두어라"서규섭 농민이 선물한 두물머리 그림. 이 모습이 그들의 꿈이자 부활의 모습일 것이다. ©정현진 기자
네 명의 농민들. 두물머리 싸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과정을 거쳤지만, 끝내 그 자리를 지켜냈다. 이들은 “농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4대강 문제를 드러냈고, 그 과정에서 결국 농지를 지킨다는 본질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면서, “농업의 가치, 유기농의 전통을 지켜왔던 선배들의 철학 그리고 사람들의 전적인 신뢰가 우리를 지켰다”고 고백했다.

지난 해 9월 3일 생명평화미사가 마지막으로 봉헌되던 날, 최요왕 씨는 생태체험학습장 조성이 두물머리 싸움의 네 번 째 국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 농민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준비하는 일은 그들 인생의 3막 쯤 되지 않을까.

곧 새 땅을 일구게 되는 날, 취재하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연대를 통한 승리의 경험을 소중히 끌어안고 남은 몫을 겸허히 감수하는 네 명의 농민들. 비록 처음 귀농할 때보다 더 두렵다고 고백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더 큰 희망과 바람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기꺼이 사순 시기를 견디는 것은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곧 도래할 부활의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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