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봄 학기마다 나는 '사회정의와 영성'이란 과목을 개설한다. 이 과목은 수업을 듣고 과제물을 제출하는 것뿐 아니라, 봄 방학을 이용해 열흘간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오지, 미시시피에 가서 집 없는 가족들이 거할 집을 지어주고 돌아온다. 그들은 열흘이면 자신들이 집을 다 지어주고 올 거라는 야무진 기대감에 차 있다. 어찌 보면 어이가 없지만, 젊은이다운 패기가 무척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하는 노동은 겨우 50시간이다. 노동이랄 것도 없지만, 누군가에게 집을 지어 준다는 좋은 마음에 그들은 마냥 들떠있다.

학생들이 노동을 준비한다면 나는 매일 저녁 그들과 나눌 묵상거리를 준비한다. 노동해 본적 없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한계와 노동의 어려움 때문에 쉽게 실망한다. 또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뺀질거리거나 그 외의 거슬리는 행동들로 분열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격려와 위로, 화해 등 여러 가지 작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박정은
이 과목을 위해 내 봄 방학을 희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겨울방학이 겨우 20일 뿐이라 학생도 교수도 모두 봄 학기를 힘들게 보내기 때문이다. 봄 방학이란 가뭄의 단비 같은 휴식이요, 학기를 마치는 5월 중순까지의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이다. 대부분 나의 동료들은 집에서 쉬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영화도 보면서 지낸다. 저질 체력에, 희생정신이 충만한 거룩한 수녀도 못 되는 나로서는 봄 방학을 반납하는 것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여행을 통해 내가 얻는 것이 너무나 귀해 나는 또 미시시피행 짐을 꾸린다.

이 노동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깊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수업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않던 깊은 속내를 미시시피의 가난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나누어 준다. 이번 노동여행에서 내가 깊이 만난 학생은 앤지와 베로니카로, 그들은 고등학교 때 엄마를 잃고 신심 있는 가톨릭가정에서 머무는 고아였다. 어린 나이에 어려움을 겪고도 항상 긍정적이고 모든 일에 깊이 감동하는 이 친구들을 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또한 하느님이 맺어주신 그들의 친구로서 갈 수 있는 한 멀리 동반하리라는 결심도 했다.

또 13살부터 피자집에서 일했다는 질리안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모습이 참 좋았는데, 어느 날 저녁, “누구에게 유명해지고 싶은가?”라는 주제로 묵상 나눔을 하다가 그녀의 아픔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날 학생들은 대부분 내가 지어 줄 집에 살 사람들, 혹은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들에게 유명해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질리안은 ‘나의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에게 유명해지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묵상 후 나는 그녀를 꼭 안아 주었고, 그는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웃었다.

ⓒ박정은
학생들과의 깊은 만남 외에도 이 수업이 내게 주는 커다란 은총은 가난을 직시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부유한 나라에 이 가난한 오지는 거의 충격에 가깝다. 우리는 미시시피 하면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같은 이야기 혹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리며 감상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미시시피는 미국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모든 발전에서 철저히 소외된 곳이다. 산업화가 도시 위주로 진행되면서 농촌지역이 소외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만, 미시시피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우리가 매년 집을 지어주는 이곳 텃와일러에 정부가 제공하는 유일한 산업 (여기서 산업이란 고용을 창출하는 기제를 의미한다)이란 고작 교도소다. 학교도, 병원도 없다. 이곳에 30년 전에 우리 수도회의 수녀님이 병원을 차렸다. 그래서 이 동네에 가장 큰 산업은 무료 병원과 교도소이다.

나는 학생들과 텃와일러의 가난의 구조에 대해 함께 공부했는데, 결국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인종차별이란 미국사회의 병리현상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 마을에 백인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교육기관이 없으니 전체적으로 교육수준이 낮다. 교육 수준이 낮으니 전문직에 고용될 수 없고, 일자리가 없으니 사람들은 마약을 하며 논다. 그러다 보니 어린 미혼모도 많다. 곳곳에 수도가 없는 가정도 눈에 띈다. 가장 풍요한 나라의 오지를 보면서 글로벌 시대의 가난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기술과 정보, 교육의 기회가 없으으로 결국 가난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 그리고 품위를 잃은 그들이 삶이 참으로 잔혹하다.

 ⓒ박정은
이곳은 인종차별의 온상이었던 곳이며 치열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1960년대에 흑인들의 인권운동이 일어났을 때, 시카고의 한 꼬마가 백인이 운영하는 이 동네의 가게에서 사탕을 사 먹다가 공손치 못하다는 이유로 심하게 맞아 결국 사망했다. 그러나 내가 학생들을 데리고 방문한 당시 재판이 벌어졌던 재판소가 있는 마을 숨머도, 그리고 선거권을 얻기 위해 모진 매를 맞고 감옥에 끌려갔던 노예출신 여성을 기리는 그 옆 마을도 이미 모두 죽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 전체 마을이 죽은 것처럼, 아무것도 없고 여기저기 문 닫은 공장에 깨진 유리창만 유령처럼 서 있었다. 학생들은 좀비 마을 같다며 자기들은 여기서 절대 못 살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가난 옆에는 대지주들이 있다. 그 옛날 목화를 따던 노예의 손길이 더는 필요 없는 것 뿐이다. 죽어버린 듯한 거대한 대지를 달리다 보면 씨 뿌리는 비행기도 보이고 큰 저택도 보인다. 저 거대한 대지의 주인들은 여전히 백인이지만 그들은 이곳에 살지도 않고 맥시칸으로 구성된 거대한 노동인력들은 이 남부를 지나 또 어느 곳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목화로 벌어들인 수입은 소수의 백인 지주 주머니로 들어가며, 아무 쓸모 없는 노예의 후손들은 그저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면서 계속 망가져 가는 것이다. 가난은 참으로 구조적이고 한 개인을 쉽게 무력하게 만든다. 슬프게 다가오는 삶의 현실이다.

이렇게 지역사회 공부를 마친 후, 우리는 집 짓는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단열재를 대고 박는 작업을 주로 했는데, 여학생들은 빛나는 실력에 나는 행복했다. 감기에 걸려서 골골대는 남학생들과 달리, 여학생들은 이 집에 살게 될 누군가가 빨리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서툴지만 열심히 일하는 그들에게서 창조하시는 하느님, 노동하시는 하느님을 뵈옵는다. 지붕 높이까지 올라가야 하는 작업에 이르자 남학생들은 기권했고 결국 나와 두 명의 여학생이 올라가 지붕에 판을 대는 작업을 마쳤다. 팔뚝이 아프고 못 박는 일이 이렇게 어려웠던가 싶기도 하지만, 작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기쁨이 밀려온다. 노동의 신성함이란, 햇빛을 받으며 아무 생각 없이 일에 몰두할 때 오는 그런 기쁨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여학생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나를 노동의 공포에서 해방 시켰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여학생이 우리의 여정을 마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마지막 구절을 여기에서 나눈다. “우리는 미시시피를 변화시키려 왔습니다. 그러나 미시시피의 풍요로움이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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