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의 교훈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우리 동네에 있던 한 남자 중. 고등학교의 교훈,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엉뚱하게도 그 학교의 멋진 교훈을 사랑한 나는 왠지 그 학교 다니는 남학생들을 보면 호감이 갔었다. 언젠가 내가 이 칼럼에 썼듯이, 나는 어떤 문구나 단어와 사랑에 빠지고, 대부분의 사랑은 평생을 가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문구이며, 굳이 한 단어를 고른다면 “자유하다”이다.

특히 열정이 넘치던 2,30대에는 ‘자유롭다’는 어떤 ‘형태어’ 보다는 ‘자유하다’는 ‘능동적 행위어’에 많이 매료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자유롭다’로 하면 되지 뭘 유난을 떨며 굳이 ‘자유하다’라고 썼는지 픽 웃음이 나오지만, 여하튼 나의 수도생활의 기도일기에 수없이 되풀이 되는 말은 “자유한 영혼이고 싶습니다” 이다. 나이 쉰을 지나면서는 유난을 떠는 것 같은 이 표현이 머쓱해 져서, 그냥 '자유로운' 으로 아주 만족한다. 하지만, 사실 ‘자유롭다’는 형태어는 ‘자유하다’란 행위의 치열한 과정을 거쳐 얻은 결과로, 삶의 자리에서 누리는 유유자적한 마음의 표현인 듯 하다.

ⓒ황동환

자유(自由)라는 단어를 한자로 어보면, 스스로(自) 말미암다(由) 인데, 그 의미는 첫째, 남으로 인한 강요나 통제로 기인한 어떤 존재감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택하고 결정한 삶의 자세나 상황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나보다 훌륭하고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떤 일의 방향이나 결정을 강요하거나 통제할 때, 더 효율적이고 성공적일 수는 있겠지만, 그 경우 한 사람의 영혼은 주체성을 잃는다. 그러므로, 아무 강요나 강박이 없는 상태인 이 자유라는 말은 자신의 삶에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 자유는 자기 본연의 모습인 상태로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 편안한 상태이다. 이 상태는 결국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선택 할 수 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자유라는 말은 스스로 한 일이나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의지적으로 선택한 행동을 책임지는 것은 억지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 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가볍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자유란, 능동적인 주체성, 그로인한 책임을 지는 인간의 상태이며,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자신에 관한 지식에서 출발한다.

자유, 진리이신 그 분을 대면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는 것
아픔을 통해 우리는 자유로움으로 나아간다.

신앙인에 있어서 자유란 무엇일까? 나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서의 말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럼 진리가 무엇일까? 어떤 면에서 진리라는 것은 요한복음서의 화두라고 할 수도 있다. 아주 직접적으로 ‘진리가 무엇인가’라 물은 사람은 빌라도였다. 복음서의 이 장면을 묵상할 때면, 진리를 대면하고 나서 자유로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카이로스(kairos)에 놓인 한 고독한 인간을 만난다.

진리를 만나는 상황, 즉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상황에 관련해 요한복음서는 ‘본다’는 단어를 아주 자주 사용한다. 본다는 것은 곧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아 믿는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복음서는 진리가 무엇인지, 자유를 주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분을 알고 그 친교 속으로 들어갈 때, 진리라는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대면하고 나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때 새롭게 깨닫는 것은 아름다운 자신의 참모습이다. 또한, 진리이신 그분을 대면한다는 것은 자신의 참모습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삶의 과정이다.

그러기에 신앙인에게 있어서 자유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 해방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우리 삶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일상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사실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특히 아프고 어두운 체험은 내 딱딱한 영혼의 껍질을 깨는 아픔으로 작용하고, 그 체험을 진실하게 대면할 때 우리는 점점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는 것도 아프고 힘들었는데 그 체험을 통해 자유로움을 향해 나가지 못한다는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니까 말이다.

자유로 나아가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면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두려움은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실존이다. 그래서인지 성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받은 많은 제약과 수치심은 결국 두려움을 낳는다. 남들이 뭐라고 할까봐, 손가락질 할 까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며,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를 머뭇거린다. 그런데 내가 내 삶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 타인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면 무척 화가 난다. 그리고 쉽게 남의 삶을 매도한다.

내가 이웃에게 손가락질하고 싶은 때는 내안에 무엇이 부자유한가를 보아야 한다. 내가 내미는 손가락은 사실 내 안에 소화불량으로 남아 있는 부자유한 나를 좀 보아달라는 내 내면의 간절한 손짓이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모두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저 서로를 부축하면서 함께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어깨를 내어 주는 너그러운 마음은 내 삶에 녹아든 자유로움에서 온다.

회당에서 추방되더라도 "나는 내 체험을 이야기하겠소!"
예수를 만나 눈을 뜬 소경, 진리 속에서 자유인으로 거듭나

자유를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텍스트의 하나는 요한복음서 9장 태생 소경의 이야기이다. 여기 등장하는 이름 모를 소경은 거지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장애인은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그의 인격에 깃든 존엄함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사람 앞에 진리이신 예수가 나타나 그의 눈을 만져주셨고,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의 목소리가 없던 이 사람은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보게 해준 그 사람을 보고 싶다고. 사회적으로 지위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초라한 이 사람은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분은 예언자시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공동체에서 소외되기를 두려워하는 그 부모의 답변이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지금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여 주었는지 모릅니다.” (요한 9, 21). 성서는 그 부모가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진리를 대면한 이름 없는 이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주장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예언자일 수밖에 없다고. 물론 그 결과 그는 회당에서 추방된다. 다시 말하면,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된 것이다. 그는 회당을 걸어 나와 예수 앞에 서며, 그분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자유인을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의 내적인 힘, 즉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자유를 체험하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 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눈을 뜨고 진리를 만난 그 사람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여기서 구걸하던 그 거지가 맞다 아니다를 놓고 시비를 가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한 사람의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을 이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도 그분이 내게 물으신다. 진리가 무엇이냐?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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