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나에게 피정이라 하면, 하느님을 꼭 뵙고야 말겠다는 결연함이 있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보고 느낀 게 하나 있다면, 미국 사람들의 농땡이스러운 여유로움인 것 같다. 그게 내 눈에는 참 열심이 없는 심드렁한 모습으로 보였다. 가령 30일 이냐시오 영신 수련피정 때도 미국 친구들은 느긋하고 좀 나태해 보일 정도로 즐기는 모습이었다. 뭐 절실하게 침묵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와인을 마시거나 천천히 산책을 하거나 하면서 행복해 했다. 그때 나는 솔직히 그들이 한심해 보였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영신수련을 최소한 다섯 번은 하고 싶었고, 그것도 아주 열심히 하고 싶었다.

단 베이커라는 종교학자가 “한국인의 영성”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한국에 그렇게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또 망하지 않는 이유를 한국인이 가지는 ‘도사가 되고 싶은 열망’이라고 지적했다. 왜 우리는 그렇게 도사가 되고 싶을까? 그래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들이대는 사람을 따라가 보았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진정한 피정의 조건

피정은 “피소정념” 즉, 소란을 피하고, 마음을 닦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속, 사막, 그리고 바닷가를 선호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마음을 닦고, 시끄러운 마음을 좀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도 욕심을 부려 이곳저곳 유명한(?) 피정 집을 많이 가보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가 다 거기고 피정의 집을 운영하느라 힘들어 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리고 미국의 어느 식당처럼, 여전히 멕시코인들이 요리하고 청소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다면 피정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가 되겠다. 어떤 공간이면 내 맘의 시끄러움을 잠재울 수 있을까.

▲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면서 발견한 것은 내가 사는 동네가 새롭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박정은 수녀

나는 여름에는 우리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산타 쿠르즈 바닷가의 피정의 집에 머무르면서 다른 수녀님들과 피정지도를 하고, 내 기도 시간도 갖는다. 그런데 사실 나의 침묵 속에 길어 올린 기도도 기도지만, 함께 앉아 타인의 여정을 들으면서 하느님을 더 깊이 뵙는 것 같다. 고백하건데 내 영혼이 메마르고 기도하기 어려울 때, 피정을 지도하면서 듣게 된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갈증이 얼마나 나를 지탱해 주었는지! 또 수도원에서 나와 혼자 공부할 때, 여성의 원 피정에서 서로 나눈 아픔들이 또 얼마나 나를 깊이 위로해 주었는지! 그래서 지금도 이 자리, 피정이나 영적지도는 교수로서의 지위나 학자로서의 명예 따위에 내어 주지 않는다.

이번 겨울, 거의 70개의 학기말 페이퍼를 읽고 나는 갑자가 피정이 “고팠다,” 거의 허기에 가까울 만큼. 어디 좀 한적한 곳에 가서 쉬자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미국의 경우 겨울방학은 한 20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서 일주일 정도를 빼면 다음 학기 교안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디” 좀 가서 쉬자면 비행기 예약에 혹은 운전 십여 시간에 공연히 체력만 빠질 것 같아 “여기”서 좀 쉬기로 했다. 언젠가 시애틀에서 공부할 때 한번은 내 방에서 주년 피정을 한 적이 있었다. 방에 앉아서 하루 종일 기도를 하고 당시에 아주 가까이 지내던 한국 여학생이 엘리야에게 빵을 물어다 준 까마귀처럼 내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름 불가에서 하는 하안거나 동안거를 흉내 낸 것 같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피정이 준 선물

이번에는 그런 소란스러움도 번거로워서 그저 조용히 컴퓨터를 끄고 전화도 받지 않기로 했다. 어디로 가는 시간을 잃지 않으니 이틀은 번 것이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성서통독 피정을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새해를 맞는 순간에 읽게 되는 부분을 올해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시력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올해에 보니 영어판 성서는 글자가 너무 작아서 글자가 퍼져 보이는 것이 영 읽기가 힘들었다. 눈이 아파서 글자가 큰 한국어판으로 바꾸고 밤에는 컴퓨터를 켜서 웹사이트에 있는 성서를 읽었다. 늘 엎드려서 돋보기를 놓고 성서를 읽으시던 어머니 생각도 나고, “눈은 흐렸어도 임 향한 마음이야 변할 리 있으리까”하는 최민순 신부님 시도 떠올랐다. 성서를 보면, 여기저기 맞지 않은 이야기도 많고 성서 편집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너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보다도 성서가 거룩한 것은, 내가 보기에는 정직하게 드러난 인간의 죄스러움이 아닐까 싶다. 지난 학기에 구약성서를 가르쳐서 인지 페이지를 넘기면서 학생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왜 성서학은 나의 신앙을 이렇게 허무는 거냐던 학생과 왜 성서에 나오는 여자들은 모두 종이거나 첩이거나 창녀인거냐고 묻던 학생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눈이 아프면 천천히 집을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내가 사는 곳은 알라미다라는 작은 섬으로, 어느 방향으로든 10분을 걸어가면 바닷가가 나오고 5분만 걸어가면 카페들이 나온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면서 발견한 것은 내가 사는 동네가 새롭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칙칙한 색깔로 칠한 너무나도 평범한 집 앞에 놓은 형광색 의자가 갑자기 무덤덤하던 그 집에 어떤 성격을 부여한 다는 것. 회색으로 칠한 집 벽에 갑자기 도발적인 보라색 라인이 들어감에 세련된 주인의 취향이 느껴진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내가 사는 이 거리가 아름답게 보였다. 꼬마들이 뛰어가며 지르는 소리가 아름답고 친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비로소 내 안에는 피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이다.

또 한 가지, 산책 후 카페에 앉아 성서를 계속 읽어가면서 깨달은 것은 어느 곳에서든 어린이들이 내게 다가와 웃거나 말을 건다는 점이었다. 사실 나는 어딜 가든지 아이들과 대화를 잘 나눈다. 그런데 피정 중에는 이상하리만큼 아이들이 내 옆에 와서 나를 보고 가거나 다가 왔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이 내 주위를 맴 도는 걸 보면서 나는 한 번 더 깨달았다. 내안의 소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12월 31일 오후 5시 나는 바닷가에서 우동을 한 그릇 시켜 몸을 따뜻하게 한 후 해가 지는 순간까지 걷기로 했다. 한 해를 돌아보니 감사할 것 밖에 없고, 고마운 일 밖엔 없어서…. 5시 30분경에 찬란하게 해가 잠겼고 고요했다. 나는 해지는 바닷가에서 ‘도나 노비스 파쳄(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수치를 벗겨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게으름과 여유 덕에 올해 통독피정은 아마도 다 마치지 못하지 싶다. 그래도 뭐 좋지 싶다. 부드러운 푸른빛이 도는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울컥 쏟아지는 걸 보니, 이번 피정, 뭐 어디로 떠나지도 못했지만,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동네에 평화, 내가 사랑하는 나라에 평화, 온 인류에 평화!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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