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트 공장 농성장 성탄 전야미사 강론 - 장동훈 신부

12월 24일 성탄 전야미사가 인천 콭트공장 농성장에서 봉헌되었다. 이날 미사에는 인천교구의 이재학, 장동훈, 이경일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서영섭 신부, 예수회의 김정대 신부, 서울대교구의 나승구 신부가 참석했다. 이날 미사 전에 해고 노동자들의 성탄 음악회와 참회예절이 있었다.

이번 미사는 공장 안에 비닐 천막을 치고 현수막들을 모아 천정을 덮어서 예년보다 따뜻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아울러 이날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특별후원금 전달이 있었는데, 김영욱 신부와 인천교구 노동사목, 개인들이 가져온 성탄 저금통 등이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날 장동훈 신부가 행한 강론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 성찬의 전례.ⓒ김용길 기자

이름도 모를, 스쳐지나가는 한 인연이 마음을 잡는 저녁입니다. 몇 년 전 노동사목에 동료에게 이끌려 수줍게 찾아오던 한 사내가 생각나는 저녁입니다. 늘 그의 옷에는 페인트 자국이 남아있었고 어찌 그리 그림에나 나올 법하게 노동자 같던지, 후줄근한 잠바대기에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작업 조끼, 밑이 달은 작업화가 너무나 꼭 맞게 어울리던 초라한 이였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던 그는 두 딸에 철없는 아들까지 세 아이를 혼자 키워내면서도 아직은 무슨 뜻인지도 모를 미사에 참석했고 뒤풀이에도 늘 함께했습니다. 아무리 길게 말을 건네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짧은 단문일 만큼 말수가 없었습니다. 주위에서 주워들으니, 어렴풋이 추측하기에 살아가기가 여간 빡빡해 보이지 않는 기색이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름도 기억 못할 만큼 스쳐지나가도 아무렇지도 않을 인연이 생뚱맞게 요즘 제 마음을 틀어막고는 나오질 않습니다. 간간히 미사에서나 만나던 그가 죽은 날은 봄이 채 찾아오지 못한 오늘처럼 추운 날이었습니다. 집수리 일을 하던 그가 귀가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나질 않아 아이들은 그저 피곤해서 아빠가 잠을 자는 거라 생각했답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들은 미동도 없는 아버지를 다시 흔들어 깨우려했지만 허사였다고 합니다.

아직 봄이 찾아오지 못한 날 이름 모를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쓸쓸한 죽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못한 막내아들이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친인척들과 북적거리는 문상객들, 풍성한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저리 헤프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가, 그것도 성탄 같이 기쁜 오늘 같은 날에 제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요?

▲ 미사 전 공동 참회예절 중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이날 보속은 2012년 12월부터 2013년 1월 중에 콜트 미사 참여, 지지 방문하기였다.ⓒ김용길 기자

예수님은 하필 왜 꼭 이럴 때만 오실까 궁금합니다. 정권교체, 정치혁신, 경제민주화 따위의 말들이 여기저기 떠다닐 때 노동자들은 배낭을 꾸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벽을 틈타 한 몸 뉘이기도 버거운 좁다란 합판을 하나씩 등에 이고 하늘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60일, 또 30일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려는지 총총 철탑을 기어올라 하늘 집을 짓고는 이 지상의 요란스런 선거판을 숨죽여 지켜봤습니다. 하늘에서 노동자들은 이 꼬물거리는 지상을 내려다봤지만 지상의 사람들은 허망한 말들을 주고받느라 하늘에 매달린 그들을 잊거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정말 너무나 많은 목숨이 달려있던 선거였다고 되뇌며 큰 한숨과 절망감에 어찌할지 몰라 입을 닫아버린 며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명의 노동자가 한 많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왜 하필 이따위 더러운 인간 땅에 저리도 힘없이 나약하게, 천둥벌거숭이로 오는가? 와서 어쩌자는 것인가? 왜 하필 예수가 태어난 저 분쟁의 땅 이스라엘은 오늘도 서로를 증오하는 죽음과 광기만 가득한 곳이 되었을까? 얄궂습니다. 정말 얄궂습니다.

절망의 크기가 너무 커서 담을 가슴도 없습니다. 무엇이 이 인간의 땅을 절망하게 하는가? 무엇이 죽음을 부르고 무엇이 평화를 해치는가? 아니 무엇이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지킬 것이며 무엇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그러기에는 저 핏덩이로 이 세상에 천둥벌거숭이로 태어난 아기는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즘 제 가슴 한편을 꽉 틀어막고 있는 그 이름도 가물가물한 죽음의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그의 부고소식을 들은 때도 무척 바쁘게 뛰어다니던 시절입니다. 낙동강을 하루종일 왕복운전하며, 여기저기 온갖 곳을 찾아다니던 저의 바쁜 일상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늘 추운 성탄이면 울어도 또 울어도 풀릴 것 같지 않은 이 한반도의 절통한 사연들로 비장한 강론을 해야 했고 다시 일상에 돌아와서는 이것저것 분주했으며, 그 분주함이 열심히 사는 증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더욱 절통한 죽음들 앞에 왜 하필 이름도 어렴풋한 그가 제 앞에 등장해 가슴을 틀어막고 나오질 않는 걸까요? 아마 그의 장례식장에서 지인들과 음식을 나누며 들던 한없는 미안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미안함 보다는 낭패감입니다. ‘숲’을 본다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전 제 지척의 나무 밑동 이끼의 색깔을 기억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 번도 제대로 만져보지 못했다는 낭패감 말입니다.

▲ 아기 예수님을 천막 구유에 모시는 구유예절. ⓒ김용길 기자

죽음을 이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죽음 같은 일상이 범람하는 세상에 세상의 구원자의 탄생을 알리는 저 장엄한 복음은 고작 포대기에 싸인 벌거숭이 아이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가장 높은 곳의 가장 위엄스런 모습이 곧장 하늘을 가르고 내려와 가장 낮은 곳 가장 하찮은 모습으로 오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표징입니다. 어찌 보면 이 절망의 시대를 넘기에는 참으로 딱한 표징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표징을 사는 것입니다. 살과 피, 오장육부와 뼈로 채워진 언젠가는 아스러질 인간의 육신을 오롯이 진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줄 것 같은 말들, 우리에게 다시금 평화를 선사하고 사람들의 곡을 멈추게 하고 신명을 북돋아줄 것이라 믿었던 말들은, 그 허망한 말들은 어쩌면 ‘이념’인지도 모릅니다. 이념은 생각일 뿐, 살도 피도 오장육부와 사지육신도 없는 비어있는 텅 빈 무엇입니다. 비어있는 것은 채워져있는 것을 살리지 못하고 빈껍데기들은 살과 피와 오장육부로 살아가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허망한 기대일 뿐입니다. 누가 나의 운명을 결정합니까? 이념입니까? 사상입니까? 정치혁신, 경제민주화 같은 잡힐 것 같지 않은 헛 주먹질 같은 허망한 말들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이념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다시 또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 곧바로 제일 낮은 곳, 불멸에서 죽음으로, 무한에서 유한으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내려온 저 아기가 바로 우리들을 살릴 표징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결국 이념에 살을 더하고 사상에 오장육부와 사지육신을 더해주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알 수 없는 허깨비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밭을 갈아 곡식을 털어 밥을 지어 나눠먹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죽음을 이길 진짜 사상은 지적 순결이 아니라 질펀한 눈물이고 우리를 살릴 진짜 이념은 저 살과 피로 우리에게 다가온 무력한 아이가 보여주는 표징처럼, 이 얄궂은 사람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상은 참말을 하고 절망은 다시 희망을 몰아오며 죽음은 봄기운이 올라오듯 우리 발밑으로 사그라질 것입니다.

가물가물한 그 이름 속에 제가 기억해낸 것은 고맙게도 제가 정말로 서 있어야 할 자리이고 제 생각이 머물 거처이며 제가 키울 천둥벌거숭이 아기입니다. 표징은 가난하지만 그래서 부유하고 무력하지만 전능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또 이렇게 어두운 밤을 틈타 오셨습니다.

사상의 거처
-김남주

(중략)

사상의 거처는
한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과 서재가 아니라는 것을
한두 놈이 머리 자랑하며 먹물로 그리는 현학의 미로가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라는 것을
사상의 닻은 그 뿌리를 인민의 바다에 내려야
파도에 아니 흔들리고 사상의 나무는 그 가지를
노동자의 팔에 감아야 힘차게 뻗어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잡화상들이 판을 치는 자본의 시장에서
사상은 그 저울이 계급의 눈금을 가져야
적과 동지를 바르게 식별한다는 것을

▲ 서로 하나 됨을 느끼기 위해 어깨동무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 ⓒ 김용길 기자

▲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들도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김용길 기자

▲ 콜트 해고 노동자들의 미사 전 성탄 음악회 ⓒ김용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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