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결코 행복한 일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소한 유교문화권에서 자란 나에게 있어, 사람이 한 번 나면 이름을 남겨야 하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겨야 한다는 말이 뼈 속 깊이 박혀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 말 뒤에는, 나 혼자 잘되자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안 전체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동양권의 공동체적인 가치관과 가족 중심의 삶이 깃들여 있다. 서양의 개인주의적 관점으로 볼 때,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신이 주신 자신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는 그런 의미가 큰 것 같다.

내가 서양의 철학보다, 동양의 철학에 탄복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균형감이다. 즉, 서양의 사고는 원죄이후 인간이 숙명적으로 끌어안고 가야하는 ‘죄’의 무게를 놓고 씨름하는 끊임없는 실존적 긴장이 중심인 반면, 동양의 천-지-인 사상은 그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두루두루를 살펴 조화를 이루라고 다독인다. 이름을 남기려고 애를 쓰는 유가의 선비에게 도가에서는 명예를 추구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동양인의 심성에 균형감을 준다.

▲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느끼게 해준 속리산 입구, 2011 ⓒ박정은

나는 개인적으로 유가의 자신을 닦으라는 교훈을 사랑하며, 좋아한다. 새로운 것을 만나고, 배우고, 그리고 알게 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내가 직장을 다닐 때, 출근 전 아침 시간을 이용해 영어 학원을 다녔었다. 어느 날 새벽 미사 후 신부님께서 다른 청년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사제관으로 초대하셨는데, 나는 “안되요, 저 학원 가야돼요” 했다. 신부님은 혀를 차시며 “소피아야, 너 왜 그렇게 사니?” 하셨고, 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 한가’잖아요?” 했다. 그러자 “얘야, 학이시습지면 불역딱호아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딱하지 아니 한가’야” 하셨다.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이십대의 내 모습이 신부님의 눈에는 좀 안타깝게 보였을까?

무언가에 몰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그 결과로 성공에 이른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무엇에 성공하고 싶은가는 깊이 식별해 볼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것과는 좀 별개의 일인 것 같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도는 물과 같아서 아래로 흐르고, 자기의 틀을 주장하지 않고, 담기는 대로 그 모양을 취하고, 또 자기의 이름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종지에 담기면, 종지물이고, 국그릇에 담기면 국물이고, 바다에 담기면 바닷물이다. 이처럼 물 같은 도와 가장 닮은 존재가 내가 보기에는 멸치인 것 같다. 멸치는 뭐 대단한 이름 있는 생선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존재이다. 그 멸치가 자기 온 몸을 다 바쳐 국물을 우려내면, 그 국물은 된장국도 되고, 국수장국도 되고, 시금치 국이 된다. 그 누구도, 식탁에 오른 국을 멸치 국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안다, 멸치 없이 시원하고 구수한 국을 끓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성공하는 것은 꼭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흘러 만나는 사람들에게 삶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또 흘러가는 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니 그렇게 산다면, 이름 없는 사람이 되는 일은 아주 행복한 일일 것 같다. 여고생시절, 왠지 슬픈 마음으로 읽던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같이 내면이 화려한 이름 없음이 아니라, 그저 물처럼 흘러가는 이름 없는 사람의 행복 말이다.

요한복음의 이름 없는 제자, “사랑받던 제자”와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서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사는 행복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성서다. 우선 이 복음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인공은 “사랑받던 제자”다. 그런데 이 사랑받던 제자도 결국 이름이 없다. 문학비평에서는 그런 인물을 독자에게로 열린 캐릭터, 즉 독자에게 내어주는 자리로 해석한다. 즉 누구든지, 이 작품을 읽고, “사랑받던 제자”라는 캐릭터를 자기화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사랑받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 이름 없는 캐릭터만큼 부러운 캐릭터는 없다. 마지막 만찬 때에는 예수의 품에 기대어 스승을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를 물을 만큼 스승과 가까웠고, 그 스승이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를 지켰으며, 끝내 스승이 자신의 어머니를 맡겼던 그 사람. 우리는 이름 모를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며, 알 필요도 없다. 이 “사랑받던 제자”가 지금 우리에게 그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또 다른 이름 없는 캐릭터는 사마리아 여인이다. 다른 여자 주인공들처럼 사마리아여인도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사마리아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 때문이다.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공 (기원전 722년)으로 멸망하고, 아시리아인들과의 결혼으로 혈통이 섞인, 그래서 늘 순결하지 않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단어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죄 많은, 특히 여러 남자를 거느린 혹은 거느렸던 사마리아 여인이 죄 중에 예수를 만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유혹하려 했다고까지 해석한다.

그러나 샌드라 슈나이더 같은 여성 성서학자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첫 선교사이며, 예수님과 당당히 전례와 신학을 이야기한 소위 ‘준비된’ 제자임에 주목한다. 이 복음에서 3장과 4장은 좋은 대비를 이루는데, 3장의 사회적 명망을 지닌 (이름을 가진) 남성 캐릭터 니고데모가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답변을 하는 반면, 4장의 이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고, 예수님은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처음으로 명료히 드러내신다. 그렇기에 사마리아의 한 이름 없는 여인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이름과 상관없이, 명철한 지성과 열성적인 활동에의 자리, 제자로도 초대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내가 꼭 베드로일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베드로나 요한을 꿈꾸었던 것 같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함은, 특별히 나를 타볼산으로 부르셔서 무언가를 보여주셔야 하고, 또 수난 전 땀 흘리시며 고민하실 때, 특별히 나를 부르셔야 했다. 나는 비록 잠들지언정 말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나는 제자로서 입신양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주는 은혜일까? 영적인 욕심이 가지는 천박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냥 물처럼, 단순하게 흘러갈 수는 없을까? 이제는 여러 가지 화려한 색으로 열심히 칠해온 내 삶을 한 톤 낮추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빛바랜 색이 주는 다정한 느낌이 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묵상하던 중에 무척 허기진 나를 보았는데, 나는 여러 사람들 틈에 끼어서 무언가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마음이 따스해 지는 그런 말씀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사람들 사이에 감돌던 훈훈한 인간적인 그 무엇. 그들 중에는 흑인 할머니도 있었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던 순간 내 손에 쥐어진 따스한 초콜릿 크로와상! 따스한 빵 사이로 녹은 초콜릿이 스며 나오는 정말 맛있는 빵을 먹고 있었다. (묵상 중 아마 나는 무척 배가 고팠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내가 꼭 베드로일 필요가 있을까? 내가 꼭 요한일 필요가 있을까? 이름 없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 예수, 그 분을 그저 사랑하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분처럼 사랑하고, 또 못하면 말고…. 그런 이름 없는 제자로 살 수 있다면, 그게 나로서는 가장 행복한 삶, 성공한 삶일 것 같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