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대림절은 나에게 설레임의 시간이다. 왠지 대림 기간 동안 새벽미사 가는 길은 하나도 춥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림은 내게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초대되는 시간이다. 신앙의 신비를 표현하는 보라색으로 장식된 제대와 4개의 아름다운 초가 놓이는 대림환은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시다’라고 고백하게 한다. 게다가 대림기간에 읽는 독서 말씀들은 기다림의 희망과 구원의 설렘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들로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이야기한다. 대림기간에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은총표를 받기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주일학교 선생님께 내미는 어린이들의 예쁜 손이다. 이렇듯, 무언가 설레고 푸근한 대림 한가운데로 그렇게 성탄은 우리 안으로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올지 안 올지 모르고 기다린다면, 그건 설레는 기쁨이 아닐 것 이다. 무턱대고,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기다림이 한편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일일 수 있겠으나, 매우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여우는 올 시간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 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 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 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되겠지. 아무 때나 오면 언제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지 모를 거야”라고. 대림이란 시간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인지 헨리 나웬의 제네시 일기에도, 침묵을 지키는 트라스피트 수사님들조차도 터져 나오는 성탄의 기다림의 기쁨을 누르지 못해, 조금씩 수런수런 침묵이 깨어지고, 성탄에 이르러서는 환희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스도의 두 번째 임하심, 두려움이 뒤섞인 기다림

그러나 만일 이런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기다림과 기쁨만을 이야기 한다면, 온전한 의미에서의 대림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대림은 사실 두 가지 다른 차원의 기다림을 담고 있다. 하나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강생을 기다리는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임하심, 즉 재림에 대한 기다림이다. 첫 번의 기다림이 설레고 기쁘기만 한 기다림이라면, 두 번째 기다림은 마지막 심판이라 좀 무서운 감정이 뒤섞인 기다림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맘속에, 두 번째 기다림은 슬쩍 모른 체 하고 싶은 심정도 있는지 모르겠다.

이 두 번째의 대림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종종 “이미 온, 그러나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already, but yet)”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너무 많은 영화를 보아서인지, 마지막 날, 주님이 도래하시는 날을 생각하면, 공포가 앞선다. 유황불, 최후의 심판, 그리고 아마게돈 전쟁을 연상한다. 요즈음 같이, 생태계의 이상, 지구 온난화, 그리고 자연재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그 마지막 날이 도래한 것 같은 불안도 생긴다. 마야 달력에 의하면, 2012년 12월 21일 인간성의 급진적 변화가 일어난다고도 하고, 그래서 급진적 변화란 무슨 뜻인가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고, 종말을 예고하는 조짐으로 등장하는 선과 악 사이의 우주적인 전쟁이 주종을 이룬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도 결국 그런 종말적인 전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거기에다 종말을 더욱 두렵고 무서운 시간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은, 중세 교회의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 즉 천당의 문 앞에 사도 베드로가 열쇠를 쥐고 있고, 천사가 저울을 들고 죽은 영혼이 살아생전에 행한 선행과 악행의 무게를 재는 모습 때문이 아닌가 싶다.

▲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스타워즈 공식 홈페이지 www.starwars.com 갈무리)

과연 두 번째의 대림은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일일까?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그 재림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성서의 묵시문학의 본질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문헌은 박해 받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쓰인 글이다. 다시 말해 저자가 소통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독자는, 박해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다. 그들에게, 로마 제국의 폭압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곳에 임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지 아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우주적 전쟁이란 비유로 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 문헌, 특히 요한 묵시록, 혹은 이 문헌에 쓰인 문학적 비유들이, 21세기를 사는 독자들의 상상력에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활발히 작용하는 것 같다.

동화 <강아지똥>과 강정마을에서 찾은 구원과 종말론적 희망

하지만, 결국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의 핵심적 메시지는 마지막 심판의 두려움보다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에 대한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어린양과 사자가 함께 뒹구는 그런 하느님 나라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실현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구원과 종말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고, 구원이 이 땅에 인간의 일상 속에서, 인간의 노동과 땀 가운데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듯이, 종말도, 역사의 한 가운데, 즉 일상의 날들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말씀이 사람이 되심으로 역사 한 가운데서 일어난 구원은, 이제, 우리가 구현하는 작은 몸짓 안에서, 종말 사건,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종교학 시간에, 개인적 구원과 공동체적인 하느님 나라 건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을 보여 주고, 제주도 강정 마을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강아지 똥을 보여주자, 처음에 학생들은 웃으며 장난치듯 보기 시작하더니, 결국 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내 학생들에게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저자가 내가 존경하는 “권. 정. 생.” 이라고 정확히 가르쳐 주었다. 학생들은 강아지똥이 아름다운 꽃이 된다는 그 이야기에서 개인의 구원을 이해 할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이어 나는 강정마을에 관한 유튜브 동영상 보여주었는데, 학생들에게 제주도는 굉장히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나도 강정마을의 지킴이들이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는 비디오를 보며, 대림 3주에 우리가 함께 읽는 스바니아 3장 “명절이라도 된 듯 춤을 더덩실 추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이 구절을 떠올렸다. 많은 투쟁의 장면이 있었지만, 내겐 함께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사람들의 투쟁이 가장 종말론적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김용길 기자

미국의 쇼핑 몰에서는 11월 초부터 성탄 노래를 틀어 놓고, 정신없이 ‘상업주의’가 조장하는 성탄으로 들어오라고 난리다. 올해는 대림 4주가 12월 21일 이라, 더욱 대림 기간이 짧다. 그러나 분명한 건 대림의 기다림, 그 설렘이 없다면, 성탄의 기쁨이란 추상적이고 천박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임한 하늘나라,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하늘나라를 기다리며, 조급한 마음으로 설레며, 무언가를 서툴게라도 시작하고 싶다. 그렇게 극적인 선과 악의 우주적인 전쟁은 아니더라도, 구조적으로,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이 땅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대림을 살아야 할까. 대림은 짧아, 자칫 하면, 어영부영 성탄으로 넘어간다. 그러기에 정신 바짝 차리고 ‘지금 여기에서’ 기다림에 충실해야 한다. 이미 여기에,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를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 now here)가 아니면, 아무데도 없는 것(no where)을 깨닫고, 대림의 시간을 최대한 확장하는 일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