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황산]

평소 읽는 책이 하나도 없다보니...

▲ 평소 읽는 책이 하나도 없다보니 책을 통한 공감을 이루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리고, 대화의 소재라 봐야 늘상 교회 안에서 반복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의 무가치한 일들이나 티브이, 미용실, 장터 등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된다. ⓒ 한상봉 기자
그 사람이 평소 읽는 책, 그 사람이 쓰는 글, 그 사람이 평소 말하는 대화의 소재, 그 사람이 맺고 있는 인적 네트워킹, 그리고 평소 그사람이 갖고 있는 정치, 사회, 신앙..에 관한 또렸한 가치관...

한 사람의 의식의 흐름을 통한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는 대저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쉬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서로 공감의 관계를 맺기도 하면서 때로는 무리로부터 소외당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을 스스로 무리로부터 소외시키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러한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누구나 쉬이 갖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관계를 통해 쉽게 드러나는 것일까 하는 데는 늘 의문이 따른다. 대개는 정체성이나 의식의 명료함이 불분명하다보니 상대방의 정체성을 파악할 건더기 하나 없는 것이 우리네 주변에서 쉽게 보는 보통의 사람의 모습이기도 한것 같다.

평소 읽는 책이 하나도 없다보니 책을 통한 공감을 이루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리고, 대화의 소재라 봐야 늘상 교회 안에서 반복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의 무가치한 일들이나 티브이, 미용실, 장터 등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된다. 그러니 대화시간은 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시지프스처럼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곤 하는 것이 우리네 모습일 성 싶다. 정치, 사회, 신앙에 관한 의식이라는 것 또한 또렸한 정립이 없다 보니 좌충우돌 이리저리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관심 없음" 또는 "나는 몰라" 네글자로 원천봉쇄해 버리기 일쑤다. 

얼마전 폴 에얼릭의 <공감의 진화>라는 책을 읽었다.
써커스에서 외출타기 광대의 묘기를 보며 객석에서 똑같이 의자에 앉아 몸을 들썩거리는 그런 절대공감의 감정을 모든 인류문명에 확장 적용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분열과 갈등, 증오와 불평등을 안고 있는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관계를 우리와 타인을 넘어 전 인류가 함께 이해하고 협력하는 공감의 확장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님 강의, 공감하는 신자 몇이나 될까요"

전임 신부님 시절 이야기다.  
예비자 교육, 새영세자 교육, 공의회와 가톨릭교회 교리서, 사순-대림특강...등 유난히 다른 본당에 비해 교육프로그램이 많았던 터라 성당은 연중 교욱프로그램이 끊이지않고 이어졌다. 신부님 당신께서 직접 가르치시고 교우들은 늘 문전성시로 화답을 하였다.

커리큘럼상 어렵고 까다로운 교육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께서 늘 쉽고 구성지게 강의를 진행하다 보니 항상 교육장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이 끝나고 나면 항상 머릿속에 의문과 회의가 들고 일어나 똬리를 틀곤 했다.

"신부님, 저많은 우리 교우분들이 왜 신부님 강의를 들으려 할까요?"
"신부님 강의를 듣고 공감하는 교우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한 다섯명? 많으면 열명?"
이게 나와 신부님이 교육후 항상 나누는 대화였다. 한마디로 "아무생각없이 그냥 듣는다"가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다섯이 될지, 열이 될지 모를 그 신자들을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 신부님은 정말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셨다.

공감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공감한다는 것은 정서,감정, 의식을 함께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감은 평소 일상의 생활로 그리고 연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져 나와야 한다. 평소의 생각이, 의식이, 행동이 일목요연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거대자본을 앞세워 골목상권을 초토화 시키는 SSM(기업형 슈퍼마켓)의 횡포를 읽어내지 못하고 성당문을 나서는 순간 발걸음을 SSM으로 옮겨 거리낌없이 장을 본다거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평화를 실컷 교육받고 나서 뒤돌아서서는 미국만세!, 북괴박멸!, 군비증강!을 외치며 강정의 아픔을 무관심으로 일관해버린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위장인간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아니면 아무런 의식의 작동이 없는 무의식, 무개념 인간으로 내려앉게 되는 게 아닐까.

"정의는 그안에 분노를 지닌다"

▲ <의자놀이>, 공지영, 휴머니타스
공지영 작가가 얼마전 르포르타쥬 <의자놀이>를 썼다. 쌍용자동차 이야기다. 자본의 논리 앞에 이리저리 이용당하고 피해를 보다 끝내 해고당한 사람들을 극단적인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국가와 기업을 고발하고 희생자들의 아픔을 피맺힌 절규로 써내려간 르포다.

코란도, 무쏘를 생산하는 자동차회사 정도의 정보만을 갖고 있던 공지영 작가는 해고자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국가와 쌍용차의 엄청난 부도덕성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피맺힌 절규로 세상을 향해 알리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2,246명의 노동자 가운데 3년동안 22명이 죽어나갔다. 성폭력에 희생된 한사람으 희생자는 쉽게 관심갖고 기억을 해도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 22명의 죽음은 관심두지 않는다. 국가도, 사회도 그리고 교회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이 사회가 정상적인 것인가? 도체체 이 교회가 정상적인 것인가?

쌍용자동차 가족들과 공지영 작가가 공감을 이뤘고 그 책을 읽은 나도 공감의 축으로 맺어졌다.
읽어야 한다. 보아야 한다. 공감해야 한다. 분노해야 한다. 참여해야 한다.

공지영 작가의 <의자놀이> 꼭 읽어야 한다. 우리의 정신사용을 헛되이 먹고 마시는 데 쓰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아픔을 겪고 있는 데,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성당안에서 나 한사람만의 마음의 고요와 평화만을 추구하는 신앙놀음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정의는 그안에 분노를 지닌다. 정의에서 나오는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중에서)

황산 (서울대교구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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