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황산]

말러를 들어야 클래식음악에 마침표를 찍는 다는 말이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회자되었던 적이 있다. 그만큼 구스타프 말러의 곡은 훌륭하기도 하거니와 대중이 접근하기가 어렵고 친숙하지도 않다는 의미여서가 아닐까 한다.

어떤 이는 말러를 듣기 위해선 반드시 슈베르트를 거쳐야하고, 또 어떤이는 부루크너를 듣고 비교해서 말러를 들으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말러 하나만 듣기를 고집하기 보다는 고전과 낭만을 통과해온 여러 음악을 거친 후 말러를 들어보라는 주장인 것이다.

▲ KBS 명연주 명음반 홈페이지 갈무리

엊그제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KBS 명연주 명음반’ 방송 10주년 영상콘서트에 다녀왔다. 명연주, 명음반이란 타이틀에서 느껴지듯이 이 프로가 지향하는 방향성은 명료해 보인다. 다른 프로, 다른 매체, 다른 경로를 통해 쉬이 접근 가능한 조금은 듣기에 편한(easy listening) 음악 보다는 전설적이고 기념비적인(그래서 다소 희귀성을 좆기도 하겠지만) 명반의 반열에 오른 음악들만을 엄정하게 선곡하여 방송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내 생각은 그날 콘서트 현장에서 프로그램 진행자(정만섭)가 공교롭게 직접 말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공교롭게 느껴지는 대목은 그날 연주된 6곡 중 그토록 어렵다는 말러와 부르크너의 곡이 절반인 3곡을 점유 했다는 사실이다.

콘서트장에 들어찬 사람들은 한가로운 저녁시간의 유희를 우아하게 즐기러 온 급조된 클래식 애호가도 있었겠지만, 오랫동안 그 프로가 지향하는 음악적 세계와 공감을 맺고 있는 많은 애청자들이 아니었나 싶다.

급조된 클래식 애호가였건 오랫동안 공감을 맺어온 사람들이었건 그 프로의 진행자는 대중을 향해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의 음악적 공감의 세계를 말하려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즉, 다른 프로, 다른 매체, 다른 경로에서 쉬이 접근 가능한 편안하고 귀에 익은 음악보다는 이 음악세계로 들어와 보세요, 라고 대중을 향해 문을 열며 말을 걸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쉽고 편한 것이 훌륭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어

이 대목에서 우리는 ‘꼭 대중성이 있어야 훌륭하고 가치가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을 갖는다. 대중성으로 치자면 어린 코흘리개부터 연로한 어르신까지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와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라는 피아노곡을 드는 데 누구나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제를 위하여’와 ‘소녀의 기도’를 두고 클래식 음악세계에서 우뚝 솟은 대 명곡이라고 주장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다.

사회학자가 말하는 대중의 특성은 무엇일까? 몇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1. 이성보다는 감정, 감각, 정서에 따라 쉽게 움직인다. 그래서 모든 매스미디어와 정치인, 기업가, 종교인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쉽고 듣기 편하고 때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에만 대중의 눈과 귀가 머무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2. 유행에 민감하다. ‘강남스타일’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공해나 범람 수준으로 치닫는 것이 바로 이 현상이다.
3. 돈 중심이다. 돈과 무관한 정신적 세계를 향유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명연주 명음반’을 진행하는 진행자에게 ‘왜 이리 듣기 어렵고 모르는 곡만을 틀어대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중을 무시하는 것인가?’라고 항변할 이유는 없다. 그 세계를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기념비적인 명음반의 반열에 오른 주옥같은 음악을 선곡하는 진행자에게 '당신 음악을 듣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된다고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냐'고 따지는 순간, 대중의 수준을 일제히 하향평준화 시켜달라는 의미 밖에는 남지 않는다.

공의회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는 신자들 ... 
그러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신앙이 무엇인지 배워야

율법세계가 지배하던 당시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언어로 하느님세상을 이야기 했다.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깨트렸고, 불가촉천민인 죄인과 세리, 창녀들과 어울려 다니셨다. 당연히 그러려니 여기며 살아왔던 세상을 지배하던 가치체계와 의식세계를 예수님께서는 무너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들었던 자들은 놀라워했고 경이로워했다.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의 죄악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한나 아렌트라는 학자는 세상에 만연한 악을 두고 그 악을 저지른 죄의 사악한 본성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악을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과 사유의 부족에서 악이 비롯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율법주의 시대에, 가깝게는 유신시대에, 5공화국 시대에, 우리는 악을 바라보며 악을 깨닫지 못하는 무사유(無思惟)가 대중에게 천착될 때 악이 곰팡이처럼 대중을 향해 퍼져 나갔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올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이다. 그런데 정작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향해 교회가 대화의 문을 연 공의회를 이야기하면 귀를 닫고 싶어 한다. 듣기 싫은 것이다. 그건 소수의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라고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10월도 이제 중순을 넘어 달이 접히는 시기다.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공의회 소집 50주년의 흔적은 교구 행사나 심포지엄에서 떠들썩하게 다루어지지만, 정작 본당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한다. 그저 행사일 뿐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무슨 결정이 있었고, 어떤 사목적 지침이 내려왔는지, 정신은 무엇인지 내 알 바 없다. 그저 본당에서 시키는 대로 신앙생활 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난무하다. 특히 <사목헌장>은 정치, 사회, 경제 이야기들을 다뤄서 도통 어려운 이야기들이라 거북하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신앙생활과 정치가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조만간 12월이 되면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될 텐데…. 그도 남의 일이다.

그러나 쉽고 감미롭다는 이유만으로 ‘엘리제를 위하여’나 ‘소녀의 기도’만을 줄창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당대 음악가의 시대상을 공부하며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신앙이 뭔지 배워야 한다. 신앙에도 학습이 필요하다.

황산 (서울대교구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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