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송전탑 건설에 맞서 싸우는 밀양 '평밭마을 사령관' 한옥순]

“참말로 더럽다”고 표현한다. 한옥순 씨는 밀양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그렇게 부르면서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민들 몰래 송전탑 건설을 결정하고, 마음대로 공탁하고, 재산을 빼앗고, 인륜마저도 짓밟아버리는 상황을 그녀는 한 마디로 정리한다.

“정부가 국책사업이라는 장사를 하는 기라. 국민들 재산을 강탈해서 장사 밑천을 만들어갖고, 돈을 벌어갖고, 저거들만 잘 묵고, 잘 사는 기제. 있을 수 있는 일이가? 너무 괘씸해서 이리 막고 있는 기라….”

▲ 금요일 밀양 영남루에서 열리는 미사에 참여한 한옥순 씨(오른쪽). ⓒ정현진 기자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송전탑 부지 29번 현장 아래, 컨테이너 박스가 놓여있다. 혹독한 지난겨울을 움막에서 지내고나서야 들여놓은 이곳에는 살림살이가 없는 것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는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요, 전략 본부이기도 하다.

한국전력공사가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 사업을 시작한 지 7년째이지만 아직 한 기의 송전탑도 세우지 못했다. 대신 산외면, 산동면, 단장면, 부북면의 공사 현장과 자재 적재 현장 등 9곳에 송전탑 반대운동을 위한 천막과 컨테이너가 들어섰다. 부북면 평밭마을은 참여 인원은 가장 적지만 누구보다 열혈 참여자들이다. 27번과 29번 현장을 지키는 동시에 9개 현장에 지원을 나간다. 그 진두지휘를 맡고 있는 이가 ‘평밭마을 사령관’으로 불리는 한옥순 씨다.

“우리는 싸움도 재밌게 한다. 맛있는 거 해묵고, 놀고, 그러다 용역이랑 한전 직원들 오면 또 힘내서 막고….”

마을 주민들은 눈만 뜨면 이곳으로 모여든다. 현장의 모든 상황이 공유되고, 계획이 이뤄진다. 그전처럼 평범한 일상을 이어갔다면 남편이야기, 자식이야기, 살림이야기가 오갔을 이곳에 경찰, 한전, 싸움, 용역, 벌금, 연대, 지원과 같은 단어들이 춤을 춘다.

한옥순 씨는 부북면 사람들이 버티지 못했다면 벌써 송전탑이 들어섰을 거라면서 “그동안의 일은 말로 다 몬한다”고 입을 뗐다.

▲ 평밭마을 29호 현장 컨테이너 박스는 동네 사랑방이다. ⓒ정현진 기자

그녀는 남편 이남우 씨의 건강 문제로 이 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건강이 안좋은 남편이 송전탑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걱정스런 마음에 따라나섰다가 중심 역할까지 맡게 됐다. 평밭마을에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은 작년 11월이었다. 나무를 베려는 건설사와 한전 직원들을 막으려고 일흔을 넘긴 할머니 15명이 산길 맨땅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밀어닥쳤지만 그나마 사람이 있으면 공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추워서 불을 피워놓고 3일 밤낮을 지켰는데, 어느 날 용역 20여명이 들이닥쳐 할머니들의 손목을 비틀어 끌어내고는 현장에 벌목 장비와 포클레인을 들여놨다.

당시 한옥순 씨를 비롯한 3명의 주민이 119에 실려 갔지만, 벌목이 한 순간에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그 밤을 못 지내고 입원복 차림으로 마을에 돌아왔다. 그는 전 이장을 찾아가 주민들 좀 모아 달라고 울면서 사정했다. 그렇게 모인 주민들 앞에서 선언을 했다. “할머니들, 철탑 들어오게 놔 둘랍니까? 그라믄 우리도 안 막을랍니다. 같이 막아 볼랍니까? 그라믄 우리도 같이 할랍니다.” 주민들은 같이 막자고 의견을 모았고, 이장도 새로 뽑았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전 직원, “저 할머니들 뺑뺑 돌려서 내일 못 나오게 만들어”

“밤낮으로 지키는데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밥 먹고 올라가면 그 1시간 사이에 공사를 다 해버리는기라. 집에서 오가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움막을 쳤지. 여기서 먹고 자고 막으니까 막겠더라고. 천 평정도 더 되는 공사 부지에서 직원들이 나무를 못 베게 붙잡고 쫒아 다녔는데, 할매들이 뭘 얼마나 하겠나. 운신이 어려운 할매들은 나무 붙잡고 버티고, 다른 사람들은 쫒아 다녔는데, 직원들이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개 부르듯이 부르고 그랬어.”

전기톱 앞에서도 옷이 베이든, 손이 잘리든 상관없이 맨 몸으로 막아섰다. 걸음으로 쫒아가지 못하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던졌다. 직원이 다치면 자신도 잡혀갈 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하고 오직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벌목이 이뤄지는 가운데 산아래 마을에서 주민 50여명을 모아놓고 송전탑 찬성 도장을 받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한전 직원과 용역들은 반대 주민들을 마을로 못 내려가게 하려고차량을 동원해 길을 막고 벌목작업을 계속 했다. 동시에 현장의 움막도 철거하려고 시도했다.

벌목, 찬성도장, 움막철거를 10여 명이 동시에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옥순 씨는 우선 움막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고, 일부 주민은 택시를 불러 타고 내려가 도장을 못 찍도록 막았다. 주민들은 차를 불러 움막을 철거하러 온 용역들의 차를 봉쇄했다. 대치가 길어지자 용역들은 결국 배고픔을 못이기고 제발 내려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한옥순 씨는 용역들을 보내며 말했다. “다시 오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너그는 여기 철탑 못 세운다. 나는 철탑 막고 죽으려고 태어난 사람이다. 나 죽이기 전에는 몬한다. 해봐라, 질긴 놈이 이긴다.”

그녀는 이제 와서 돌아보니, 열악한 상황이지만 한 번도 그들 작전에 넘어간 적이 없다며 모두가 하늘의 뜻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 지난 해 11월 평밭마을 27호 현장에 지었던 움막. ⓒ정현진 기자

이치우 씨의 원통한 죽음으로 모두가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죽거든 백지화 될 때까지 내 시신을 그대로 둬라”

한옥순 씨는 2011년 1월에 있었던 이치우 씨의 분신 사건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때 겪었던 모든 몸과 마음의 상처가 되살아오는 듯 했다.

밀양 송전탑 이야기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황에서 4개월여 싸우고 있던 그때, 이치우 씨의 분신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평밭마을에서는 한옥순 씨가 새로 들어가려는 포클레인을 막기 위해 삽 위에 올라가있었다.

직원들이 한옥순 씨의 몸에 기름을 뿌리며 쫒고, 삽을 움직여 위협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속이 상한 나머지 펑펑 울고 있을 때, 이치우 씨의 분신과 시신탈취를 전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주민들은 그길로 달려가 경찰 저지를 뚫고 시신을 지켰다. 불에 탄 시신을 보면서, 모두 함께 했던 생각은 “이제 아까울 것도, 못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화재 사고사로 조서까지 꾸며놓은 상황에서 시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결국 합의를 통해 가족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한옥순 씨는 “내가 죽어야 이 일이 끝날 것”이라는 마음으로 죽어간 사람을 그렇게 보낸 것이 아직도 원통하다.

그 일을 겪으면서 한옥순 씨는 유서를 품고 다닌다. 이렇게 싸우면서 언제 어떤 마음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만약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자신의 시신을 그 자리에 두고 송전탑 백지화가 될 때까지 버티라는 당부를 남겼다.

싸우면서 생겼던 유혹, 자녀들 덕분에 넘겨
싸움의 힘은 어머니의 힘

한옥순 씨는 한 가지 고백을 했다. 가진 재산을 자녀들에게 넘겨놓을 생각을 했었다면서, 그 고비를 잘 넘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덕분에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반대운동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안도했다.

“애들이 전부 그건 부모님들 재산이니 알아서 하시라고 하더라. 나중에 다 빼앗겨서 아무것도 없으면 자기들이 모시겠다고…. 내가 자식들을 잘 키웠는지 못 키웠는지 생각도 안 해봤는데, 고맙더라고. 만약 그때, 재산 돌려놨으면 우리가 여기서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을까, 사람들이 따라줬을까 생각하니 너무 다행이더라.”

▲ 지난 7월 평밭마을을 방문한 수녀들과 이남우, 한옥순 부부가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정현진 기자

한옥순 씨는 “한전이 이길 거라고, 송전탑 세울 거라고 하는 건 택도 없는 소리”라면서 “지금까지 싸우면서 되지 않을 일들이 이뤄져왔다.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하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열 두 남매의 막내였고, 교사의 아내, 어머니로 살았고, 노후엔 작은 암자를 지어 봉사와 후원으로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마음먹었던 한옥순 씨는 뜻하지 않은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그는 삶이 뒤집히는 경험이었지만 고통 중에도 희망은 있고,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하면서 “그 어떤 일보다 송전탑을 막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고령의 여성들로 이뤄진 이 마을 공동체에서 이토록 끈질기게 버티는 힘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옥순 씨는 “자식과 땅을 품을 줄 아는 어머니의 힘”이라고 했다. 처음엔 물리적 충돌이 앞서고 구속 위험이 따르는 남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이 나섰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힘이 됐다면서, “땅이 귀한 줄 알고, 모든 것을 품어 안는 힘, 다 제각각이지만 그런 기질들이 모여 큰 힘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냥 재밌게 싸운다. 뭐든지 의논하고 상의하고, 오늘 싸우면서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면 오는 대로 막고, 언제 끝날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마을 어르신이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7년 싸웠는데, 앞으로 7년 더 해도 막을 수 있다’고. 우리는 그런 마음이다. 기약도 없이 그냥 뭉쳐서 막아내는 기다.”

한옥순 씨를 중심으로 시작된 평밭마을 계가 있다. 이른바 ‘백지화계’다. 송전탑 백지화 되는 날은 동시에 ‘계 타는 날’이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는 비밀이라고 했다. 차곡차곡 모인 그 바람이 언젠가 큰 기쁨의 열매가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마음을 보태고 싶다.

▲ 평밭마을 29번 현장의 컨테이너. 뒤쪽 언덕 현장에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심어놓은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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