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신학자]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Oh, sometimes it causes me to tremble, tremble, tremble)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사순 시기에 미국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성가 <거기 너 있었는가>입니다. 원래 이 성가는 강제로 끌려와 노예살이를 해야 했던 미국의 흑인들이 삶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부르던 흑인영가입니다. 성가에 관한 지식이 얄팍하긴 하지만, 제게는 이 성가만큼 십자가의 고통을 피부에 와 닿게 전달하는 성가가 드문 것 같습니다. 인간에서 노예로 탈바꿈되어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미국 흑인의 고통과 예수의 고통이 겹쳐지며 그야말로 몸을 "떨게" 합니다.

이번 주에는 미국 그리스도교회의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에 정면으로 "No"를 선언하며 백인들이 전개한 해방신학과 확연히 구분되는 흑인해방신학을 전개한 신학자를 소개하려 합니다. 미국 흑인들의 역사적 경험과 그리스도의 경험을 연결하여 흑인해방신학의 단초를 제공한 제임스 콘(James H. Cone, 1938~ )입니다.

 
제임스 콘은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북미의 대표적인 신학자죠. 아칸사스(Arkansas) 주에서 나고 자랐고,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0년부터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콘의 신학적 방법론은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지식사회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968년 <기독교와 흑인 파워>(Christianity and Black Power)를 발표하여 백인 중심의 미국 신학계에 일대 충격을 불러왔고, 이후 <예수와 흑인혁명>(Black Theology and Black Power), <눌린 자의 하느님>( God of the Oppressed), <나의 혼을 돌이키며>(My Soul Looks Back) 등 문제작들을 출판해 왔죠.

익히 알려졌듯, 콘의 신학은 철저하게 자전적이며, 실천적입니다. 흑인의 사회적 경험을 가장 중요한 신학적 자료로 사용하고, 흑인 신학자들과 그리스도교인들의 적극적 사회개입을 촉구해 왔습니다. 콘의 신학은 흑인들의 신학과 신앙이 그들을 노예로 만든 백인들의 신학과 신앙과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전제를 갖고 출발합니다. 콘에게 있어 신학은 "하느님의 백성, 특히 억압 속에 살아왔던 흑인들이 세상 속에서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해석학적으로 밝히는 작업"이죠.

신학자들의 책임이란, 바로 하느님의 백성들의 억압과 해방 경험을 그리스도의 고통과 부활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고, 하느님의 해방 사업에 참여하는 행동(praxis)이 어떤 것인가 명료하게 밝혀 주는 것입니다. 콘의 신학이 해방 전통에 서 있는 다른 신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고통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콘의 대표작인 <눌린 자의 하느님>은 이미 많이 소개가 되었으니, 저는 <흑인 영가와 블루스>(The Spirituals and the Blues)를 통해 콘 신학의 특징을 소개해 볼게요.

 
<흑인 영가와 블루스>는 신학적으로도 물론 의미가 깊은 책이지만, 흑인음악의 뿌리가 된 두 전통, 흑인영가와 블루스의 기원을 사회학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에서도 괄목할 만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콘은 이 두 음악이 장르로 탄생하게 된 배경을 소개합니다.

우선 흑인영가는 노예생활의 끔찍한 고통을 녹여 낸 한과 설움의 음악입니다. 아프리카의 독특한 가락과 리듬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묘한 조화를 이루죠. 흑인영가와 그리스도교의 메세지가 융합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은 인종차별주의로 가려질 수 없는 복음의 해방적 영성을 강조하는 콘 신학의 특징을 잘 보여 줍니다.

백인들의 어깨너머로 그리스도교를 접한 흑인들은 성서 속의 하느님이 백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며, 자신들을 보호하고 언젠가는 자유롭게 해 줄 하느님이란 것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믿음을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고향의 노랫가락들에 담아내죠. 흑인 영가는 이렇게, 하느님께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호소하는 음악입니다. 콘은 흑인영가가 마치 수화(手話)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과 울분을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노래로 표현해 서로를 위로했다는 거죠.

블루스는 흑인영가보다 대중적인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블루스의 고향은 몇 해 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큰 피해를 입은 미국의 뉴올리언스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와 노예생활을 하던 흑인들은 혹시나 고향 소식을 들을까 짬이 날 때마다 뉴올리언스 항구에 나오곤 했다죠. 이들이 모이는 자리엔 어김없이 노래가 있었습니다. 고향의 노랫가락들은 고통과 향수를 달래 주는 유일한 기제였죠.

12마디의 단조로운 멜로디에 반복적인 가사들이 붙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대중적인 가사와 드럼, 다양한 악기들이 접목되어 줄기차게 발전해, 마침내 하나의 대중음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블루스입니다. 콘은 블루스가 더 넒은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는 일상 속의 영가라고 설명합니다. 솔직하고 풍자적인 가사와 어우러진 비트가 강한 노래를 함께 부르며 미국의 흑인들은 기막히고 무섭기만 한 삶을 그나마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흑인영가와 블루스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도피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흑인영가에 종종 등장하는 죽어서 간다는 하늘나라와 비현실적인 상상력이 숱하게 도마 위에 오르곤 했죠. 이렇게 흑인영가와 블루스를 비판하는 소위 "진보적", "과학적" 신학자들에게 콘은 이 두 음악 장르를 통해 표현되는 억압의 실재를 주목하고, 그 억압에 대처해 온 흑인들이 체화한 복음의 일상적, 공동체적, 경험적 성격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만약 백인들이 이식해 온 신학적 관점, 그저 추상적인 희망과 진보의 관점으로—콘의 표현을 빌자면 백인 근본주의자들의 "그림의 떡 신학"(pie-in-the-sky theologies) 관점으로— 흑인영가와 블루스를 듣는다면 이 두 음악 장르가 그저 순간의 시름을 잊기 위한 아편의 기능을 했을 뿐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가진 자들이 노래하는 "하늘나라"와 언제 매맞아 죽을 지 모르는 흑인 노예들이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노래하는 "하늘나라"를 같은 신학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흑인영가와 블루스에 표현된 하느님과 하늘나라는 지난한 고통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위로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단 하나의 보루, 내 형제자매들의 눈 속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게 해 주는 단 하나의 안식처죠. 콘은 흑인영가와 불루스가 현실도피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단순하게 치부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 두 장르는 흑인들의 고통을 가장 솔직하게,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합니다. 짐승처럼 매를 맞고, 매일같이 강간 당하며, 개처럼 대우 받던 이들에게 이 처참한 고통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끝나야 한다는 믿음 말고 더 절실한 무엇이 있었을까요? 나도 언젠가는, 아니 적어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배불리 먹고 편히 쉴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고 더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을까요? 흑인영가와 블루스는 인간처럼 살고 싶었던,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의 노래입니다. 기필코 살아남아 내일을 보고 싶은 이들과 함께했던 하느님이 연주하시는 음악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녹아 있는 두 장르의 음악이 비현실적이라고, 진보적이지 않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겠죠.

연일 반복되는 고통과 재해와 전쟁과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또 그 엄청난 비극들에 대한 누군가의 반응을 접하며 콘의 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때로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이야기합니다. 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참으로 섬뜩하게도 직설적인 질문을 던질 것 같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수천 수만의 착한 목숨이 죽어 나갈 때, 산하가 처절하게 파헤쳐지고 삶이 터전이 송두리째 날아갈 때, 거기 당신이 있었습니까? 그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 함께 있지 않았던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을 쉽게 이야기할 수 없고, 함부로 등돌릴 수 없고, 과거 일을 들먹이며 비아냥거릴 수 없고,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불신앙 어쩌고는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어설픈 대답 대신,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 제임스 콘의 책들
<눌린 자의 하느님> (현영학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7), <맬컴 X VS 마틴루터 킹: 다르지만 같은 길> (정철수 옮김, 갑인공방, 2005), <흑인영가와 불루스> (현영학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87).

 
 
조민아 교수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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