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지금까지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여성관, 사도 바오로의 친서를 통한 바오로의 여성관, 그 이후에 쓰여진 신약 서간집에 나타난 여성관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그동안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여성에 대한 시각과 앞으로는 전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신약성서의 여성관 … 여자와 상종하고 제자로 삼은 예수, '갈팡질팡' 바오로 사도

▲ 남녀 교제가 허용되지 않던 당시에도 예수는 거침없이 여자들과 상종했다. 그림은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Rembrandt, 1634)
예수는 막힘이 없는 분이셨다. 예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분이셨다. 남녀 교제가 허용되지 않던 당시에도 예수는 거침없이 여자들과 상종할 뿐더러 갈릴래아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전도하셨다. 수난 때도 남자 제자들은 모조리 스승을 버렸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의 임종과 장례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예수께서 남자들 가운데서만 열두 제자를 뽑으셨으나, 이는 야곱의 아들, 곧 이스라엘 백성 어느 누구도 제외시키시지 않겠다는 상징적 처사였다. 예수의 열두 제자 발탁을 근거로 여자들에게 사제직 수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성서 주석을 뛰어넘는 비약이라는 게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사도 바오로의 여성관은 이중적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종 · 신분 · 남녀 차별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세례식 훈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갈라 3,26-28; 1코린 12,12-13; 참조 콜로 3,9-11). 그렇지만 바오로는 지중해에서 살았던 헬라 유다인으로서 남존여비 관행과 사조의 영향을 받아 코린토 여교우들더러 교회 모임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를 가리우라고 했다(1코린 11,2-10.13-16). 또한 바오로는 부인이 교회 모임에서 물어볼 게 있어도 거기서 물어보지 말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지시했다(1코린 14,33ㄴ-35).

그러니까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남녀평등 사상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 기질이 발동하면 남녀평등 원칙을 내세우고, 헬라 유다인 기질이 발동하면 남녀 차별 현실을 감안했다고 하겠다. 필레몬서에서 보다시피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바오로의 전도 활동에 협력한 여전도사 또는 부부 전도사가 많은데, 이는 당시 시대 관습과 사조를 고려하면 파격적 현상이라 하겠다.

사도 바오로 가탁서간집(假託書簡集, 저명인사의 권위를 빌려 그 이름으로 집필한 서간―편집자 주)과 베드로 1서 3장 1-7절에 실린 가훈(家訓)과 교회훈(敎會訓)을 보면 하나같이 여자를 비하한다. 항상 서간집 필자들은 아내는 남편에게, 여교우는 남교우에게 “순종하라”고 타이른다.

또한, 아내는 남편을 두려워해야 한다고도 한다(에페 5,33; 1베드 3,2). 남편은 주인이고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한다(1베드 3,6-7). 여교우가 교회 모임에서 침묵을 깨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1티모 2,8-15). 그러니까 바오로가 네로 박해 때(64~68년) 순교한 다음, 교회 내에서 남존여비 사상은 현저히 강화되었다고 하겠다.

사도 교부 시대 "(남자) 성직자들을 따르고 존경하라"

사도 교부 시대에 이르러 성직에서 여성을 제외시키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서기 95년경 코린토 교회로부터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에게 불길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코린토 교회의 교우 청년 몇이 작당하여 교회 원로들을 내쫓았다는 것이었다. 클레멘스는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써보냈는데, 그 요지인즉 원로들을 다시 모셔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클레멘스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편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사도들은 감독들과 원로들과 봉사자들 등 성직자들을 파견한 까닭에, 이들 성직자들을 거역하는 것은 사도들, 그리스도, 하느님을 거역하는 죄라는 것이다(로마 주교 클레멘스의 코린토인에게 보낸 편지 중 42-44장). 여자들은 세 계급 성직에서 제외되었다.

110년경 로마에서 순교한 시리아 지방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도 같은 생각이다. 그가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던 중, 터키 서부 항구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서 스미르나(오늘의 이즈미르) 교회로 써 보낸 편지 8장에서 현행 가톨릭 성직 제도와 같은 제도를 전제하면서 성직자들을 따르고 존경하라고 타이른다.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따르듯이 감독(주교)을 따르고, 사도들을 따르듯이 원로단(사제단)을 따르며, 하느님의 계명을 존중하듯 이 봉사자들(부제들)을 존중하시오.”

이런 교계 제도는 지금까지 변함없다. 2천 년 교회사상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여자에게 사제직은 고사하고 부제직을 수여한 적도 없다. 교부 시대 이후 교계 제도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면 동방에서는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 ·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총주교좌가 득세하고, 서방에서는 로마 교황청이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이겠다.

'여성사제'에 대한 교황청의 공식 입장, 그리고 21세기 가톨릭교회의 전망

교황청의 공식 입장 두 가지만 상기시킨다. 신앙교리성은 1976년 10월 15일자로 <여성 교역사제직 불허선언>을 발표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4년 5월 22일자로 <남성에게만 유보된 사제 서품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발표했다.

(신앙교리성은 2007년 12월 19일 발표한 <여성 서품을 시도하는 범죄에 관한 일반 교령>을 통해 "여성에게 성품을 수여하려는 자와 성품을 받으려는 여성은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는 결정을 밝혔다.―편집자 주)

구약성서의 동태복수법(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은 예수님에 의해서 반복수법(마태 5,38-42=루카 6,29-30)으로 바뀌었다. 또한 구약 시대의 일부다처제를 예수께서는 일부일처제로 바꾸셨다. 성서의 계시도 인류의 의식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는 생생한 증거다.

사도 바오로(필레몬서) 및 그의 후학들(콜로 3,18-4,1; 에페 5,21-6,9; 티토 2,1-10)은 노예 제도를 당연시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전세계적으로 노예 제도는 인권 유린으로 간주되어 철폐되었다.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도 1990년대에 와서 철폐되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느님의 계시는 신약성서로써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함께 계속된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계시의 역사는 열려 있다. 가톨릭도 변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유엔 총회는 1967년 11월 7일자로 <여성 차별의 철폐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남성과의 동등한 권리를 부인하거나 또는 제한하는 여성 차별은 근본적으로 부당하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해이다.”(제1조)

“여성을 차별하는 기존의 법률 · 관습 · 규범 · 관례를 철폐하기 위하여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모든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제2조)

▲ 1967년 11월 7일 국제 연합(UN)이 채택한 '여성 차별의 철폐에 관한 선언' 일부 (UN 홈페이지 갈무리)

신선한 선언문이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고, 초세기 세례식 훈화(갈라 3,26-28)를 듣는 것 같다. 선언문에 담긴 남녀평등 사상은 인류의 염원으로서 장차 인류의 의식이 발전함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처신을 눈여겨보면 하느님의 계시는 예수와 전통과 더불어 끝난 것처럼 보는 것 같다. 계시의 역사를 닫힌 꼴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서 예시했듯이 계시의 역사는 열린 꼴이다. 진보적 가톨릭 여성주의자에서 탈기독교적 여성주의자로 변신한 미국 보스턴칼리지 교수 메리 데일리(Mary Daly)가 한이 맺혀서 외치는 소리를 기독교계는 그냥 헛소리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과거의 고유하고 폐쇄적인 ‘계시’에 대한 사고 또한 성계급 체계의 산물이요, 그 체계를 영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그 사회를 닫혀 있게 한다. …… 성차별주의는 질병이며, 그것은 지구적 질병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이름 붙이고자 했던 악마다.” (메리 데일리 지음, 황혜숙 옮김, <교회와 제2의 성>, 여성신문사, 1997, 308쪽)

역사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다. 세상은 변한다. 요즘 세상은 더 빨리 변한다. 가톨릭도 변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이다. 다만 그 변화는 개신교나 성공회보다는 훨씬 늦고, 정교회 또는 이슬람교보다는 조금 빠를 것이다.

끝으로 역사에서 익힌 교훈 한 마디 덧붙인다. 인권이 항상 각성과 투쟁으로 신장되었듯이, 여성 인권도 오로지 자각과 투쟁으로 확보될 것이다(위의 책, 323-326쪽 참조).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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