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부산 특강-정양모 신부] 예수의 논쟁사화와 대담사화

예수께서는 당대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들과 바리사이계 율사들과 논쟁을 벌인다. 그 짜임새로 보면 주제설정, 적수들의 이의제기, 예수의 반론으로 되어 있다. 항상 예수께서 적수들을 이긴다. 논쟁사화는 늘 예수의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논쟁사화는 종종 기적사화 양식과 겹친다(1․5․19․20).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논쟁사화와 흡사한 게 대담사화다. 다른 점이라면 대화상대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예수께 무엇을 간청하거나(12) 가르침을 받으려고 한다(11․16). 적의가 보이지 않는 게 논쟁사화와 다른 점이라 하겠다. 독일 성서학계에선 대담사화 대신 사제간의 대담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에도 논쟁사화와 대담사화가 제법 나오지만 공관복음서에 비해 신학적 성찰을 많이 담고 있어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 공관복음서의 예수논쟁 · 대담사화 목록

1. 세관원들과 어울려 식사하다니?(마르 2,13-17)

예수께서 세관원 레위를 제자로 삼고 세관원들과 어울려 식사하셨다는 단락(마르 2,13-17)은 레위 소명사화(2,13-14), 예수와 바리사이파 율사들 간의 논쟁사화(2,15-17)를 합친 복합문이다. 마르코복음 집필이전 구전과정에선 따로따로 전해오던 짤막한 두 가지 사화가 나중에 잘 합쳐져서 마치 일관된 이야기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레위 소명사화(2,13-14)는 짤막하다. 예수님의 활동 본거지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북변에 있는 어촌이었고 거기에는 작은 세관이 있었다. 알패오의 아들 에위가 거기서 세관원으로 일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셨다는 게 전부다. 소명과 추종의 골자만 언급하는 단화(短話)다. 레위는 열두 제자단 명단에는 없는 제자인데, 그를 제자로 삼은 실제 경위는 단화에서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파르나움에서 거두어들이는 관세는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 차지였다. 영주는 공무원을 시켜 관세를 거두지 않고, 임차계약을 맺어 민간인에게 관세 징수를 맡겼다.

이제 논쟁사화(2,15-17)를 살필 차례다. 서두에 “예수께서는 그의 집에서 식사하시게 되었다”(15절)고 한다. 세관원 레위를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2,13-14)와 연결시킨다면, 예수께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하셨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소명사화(2,13-14)와 논쟁사화(2,15-17)가 본디 동떨어진 이야기였다고 본다면, 예수께서는 가파르나움의 당신 집에서 식사하셨다고 보는 게 순리겠다. 가파르나움 어촌 어디에 예수님 집이 있었을까? 예수님의 집이란 수제자 시몬 베드로의 본가 또는 처가(마르 1,29-31)를 가리킨다고 보겠다! 그런데 예수께서 점잖은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지 않고 “세관원들과 죄인들” 따위 쌍것들과 어울려 식사를 즐기셨다. 한 번만 그러시지 않고 늘 그리하셨기에 “먹보요 술꾼이로구나, 세관원들과 조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 11,19=루가 7,34)라는 욕을 얻어 잡수셨다.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예수의 처신을 나무랬다. “저 사람이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먹다니?” 이에 예수께서는 단호히 대꾸하셨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시대에 6천명쯤 있었는데, 이들은 613가지나 되는 율법 조문을 꼬박꼬박 지키는 돈독한 평신도들이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서 율법 해설에 정통한 율사들이 예수께 대들었다고 한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의인으로 자처하고 세관원들 따위 천민들을 몹시 경멸했다.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던 천민 목록이 유대교 문헌에 세 차례 나오는데 참고삼아 옮겨 적는다.

- 미슈나 키두신 4,14(부당하게 수입을 올리는 8직종); 당나귀 몰이꾼, 낙타몰이꾼, 뱃사람, 말몰이꾼, 목동, 잡화상, 의사, 백정,
- 바빌론 탈무드 키두신 82a(여자들과 상종하는 10직종): 땜쟁이, 삼베를 훑는 빗 장수, 맷돌 수리공, 행상, 직조공, 양털 깎는 사람, 세탁공, 침장이, 목욕업자, 제혁공.
-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25b(사기로 수입을 올리는 7직종): 주사위 노름꾼, 돈놀이꾼, 비둘기 경주업자, 안식년 농산물 거래자, 목동, 세무서원, 세관원.

2.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니?(마르 2,23-28)

5-6월 밀이 익었을 때의 일이다. 예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갔는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마르 2,25-26; 마태 12,1). 아니면 그냥 입이 심심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까? 안식일은 글자 그대로 편히 쉬어야지 일체 노동을 해선 안 된다. 유대교 법전에선 39가지 노동을 금지했는데, 그 중 하나가 추수작업이다(미슈나 샵바트 7,2; 예루살렘 탈무드 9c,1-7).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는 것을 보고 추수작업 한다고 여겨서 항의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세 가지 답변을 하는데 그 초점이 조금씩 다르다.

답변1(마르 2,26): 성전의 제관들은 안식일마다 새 빵을 하느님 대전에 바치고, 묵은 빵은 자기네끼리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아히멜렉 대제관은 다윗이 굶주린 것을 보고 하느님 대전에 진설된 빵을 제관이 아닌 다윗에게 주었다. 굶주림은 준법 예외 상황이라는 관점이다. 이는 율법 결의론으로서 예수님의 율법관 과는 다르다. 아히멜렉이 아니라 에비아달이 굶주린 다윗에게 빵을 주었다고 하는데(마르 2,26), 이는 오기다.

답변2(마르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라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가? 태초에 사람이 창조되었고, 안식일은 나중에 사람의 휴식을 위해서 제정되었다는 말씀이다. 이는 인간 위주의 율법관으로 예수의 인본주의 사상과 딱 들어맞는다. 예수께선 안식일법보다 인간애를 늘 앞세우셨다(마르 3,1-6; 루가 13,10-17; 14,1-6; 요한 5,1-18; 9,1-41).

답변3(마르 2,28): “아울러 인자는 또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본디 하느님이 안식일 주인이시다(레위 23,3). 예수 또한 하느님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인자로서(마르 2,10) 안식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론적 근거로서 이방계 교회의 가필인 것 같다. 사실 이방계 교회에선 안식일(토요일)대신 주님의 날(일요일)을 주간 축일로 삼았다(이냐시오스, 마그네시아 교회에 보낸 편지, 9,1).

3. 음식 정결법(마르 7,15-23)

민족마다 음식 문화가 다르다. 그 가운데서도 유다인들의 음식 문화는 별나다. 유다인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않는데, 음식을 가려서 정결한 것(tahor)은 먹고 불결한 것(tame)은 입에 대지 않는다. 금기식품법은 안식일법 및 정결법과 더불어 유다인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대표적인 율법이다. 유다인들은 식물성 식품에 관해선 정결, 불결을 따지지 않지만 동물성인 짐승, 새, 물고기, 곤충에 관해선 정결 여부를 두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짐승-굽과 새김질로 구분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이면 먹어도 좋다”(신명 14,6). 먹어도 되는 짐승 열 종류가 명기되어 있다.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꽃사슴, 들염소, 들소, 들양, 산염소이다(신명 16,4-5). 낙타, 토끼, 사반은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지 않아 부정하므로 먹을 수 없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아 역시 부정하므로 먹을 수 없다(신명 14,7-8). 한국인들이 즐기는 돼지 삼겹살이나 보신탕은 어림없다. 유다인들은 가장 불결한 짐승으로 돼지를 꼽는다. 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5-164년 통치)가 유다인들을 박해할 때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여 배교를 강요한 일화는 유명하다.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지 않은 짐승, 아울러 새김질하지 않는 짐승이 불결한 까닭은 하느님께서 역겨워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신명 14,3).

새-불결한 새 스무 종

구약성서에는 불결한 새 목록이 두 차례 나온다. 레위기 11장 13,19절에선 다음 스무 가지 새를 불결하다고 한다. 독수리․수염수리․흰꼬리수리․검은 소리개․각종 붉은 소리개․가종 까마귀․타조․올빼미․갈매기․각종 매․부엉이․사다새․따오기․백조․펠리컨․희물오리․고니․각종 푸른 해오라기․오디새․박쥐. 신명기 14장 12-18절에도 비슷한 목록이 나온다. 율사들은 위의 목록들을 근거로 불결한 새 24종을 금기식품으로 정했다(바빌론 탈무드 흘린 63). 구약성서와 탈무드에 명시된 불길한 새 목록을 보면 맹금류는 모조리 불결하다. 꿩과 칠면조의 경우 율사들의 학설이 갈린다. 불결한 새들의 알은 물론 불결하다. 식용 가능한 새들의 알들이라도 수정란은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 무정란만 먹을 수 있다.

물고기-지느러미와 비늘의 유무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바다에서 사는 것이든지 개울에서 사는 것이든지 먹을 수 있다”(레위 11,9). 지느러미 또는 비늘이 없는 갈치․메기․장어․미꾸라지, 그리고 문어․낙지․주꾸미․오징어․한치 따위는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 철갑상어와 황새치를 먹는 문제에 관해선 율사들의 견해가 갈라져 있다. 언젠가 재미 동포 의사 이상구 씨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건강 강좌를 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채식을 하고, 정 물고기를 먹고 싶으면 지느러미 비늘이 있는 붕어․잉어․조기․도미를 먹으라고 강변하는 말을 듣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신도로서, 유다교 금기식품법의 영향을 받은 안식교 식사 규정을 선전했다. 이른바 이상구 건강 특강은 현대의학과 안식교 식사 규정을 교묘히 뒤섞어 놓은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에선 메기와 장어가 많이 잡히지만 유다인들은 먹지 않고 버린다.

곤충과 길짐승-대부분 노!

대다수 곤충은 먹어선 안 된다. 다만 메뚜기, 방아개비, 누리, 귀뚜라미는 먹어도 된다(레위 11,20-23). 벌은 불결하지만 꿀은 정결한 음식으로 간주한다(바빌론 탈무드, 베코로트 7b). 두더쥐, 쥐, 뱀, 도마뱀, 수궁, 악어, 카멜레온 등 길짐승은 모조리 불결하다(레위 11,29-30․41-42).

합법적인 도살과 요리

정결한 짐승을 잡을 때도 “합법적인 도살”(shehitah)규칙을 따라야 한다. 우선 짐승에 상처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이른바 여덟 가지 상처 가운데 하나도 없어야만 “적격”(kasher)이다. 적격으로 판정된 짐승을 잡은 다음에는 반드시 거꾸로 매달아서 고기 속에 있는 피가 최대한 빠지도록 해야 한다. 유다인들은 절대로 피를 입에 댈 수 없기 때문이다(레위 7,26-27; 17,10-14). 피로 만든 순대나 선지국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제관계 문헌에서는 피를 금기시하는 까닭을 이렇게 적었다. “생물의 목숨은 피에 있다.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벗는 제물로서 제단에 바치라고 내가 너희에게 준것이다. 피야말로 생명을 쏟아 죄를 벗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레위 17,11)

요리할 때 좌골신경(nervus ischiardicus)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스라엘 삼대조 야곱이 밤에 하느님과 겨루다가 좌골신경을 다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밤에 나타난 하느님이 야곱의 엉덩이뼈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짐승 엉덩이뼈의 큰 힘줄을 먹지 않는다.”(창세 32-32). 부적격인 고기와 적격인 고기가 어쩌다 뒤섞인 경우에는, 부적격인 고기가 60분의 1을 넘지 않는 경우에만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1950년대 혜화동 대신학교에서 윤리신학을 배울 때 있었던 희한한 일이 생각난다. 윤리신학 교수 신부 왈, 금육일인 금요일에 고의적으로 육류 60그램 이하를 먹으면 소죄이고 그 이상을 먹으면 대죄라면서, 저울에 60그램을 달아보였다. 율사들의 결의론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도 안 된다”는 금령이 구약성서에 세 번 나온다(출이 23,18; 34,26; 신명 14,21). 랍비들은 이 금령을 확대해석하여 우유․버터․치즈․요구르트․크림 등 일체의 유제품과 소․양․염소 고기를 함께 요리하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다. 육류를 먹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유제품을 먹어도 된다. 몇 시간인지는 율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육식과 유제품 식사 사이의 적정 시간을 두고 율사들의 견해가 각양각색이다. 육식 후 한 시간, 세 시간 또는 여섯 시간이 흘러야 유제품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유제품을 먹은 다음에는 곧 이어서 육식을 할 수 있다. 단, 입을 헹구고 빵을 씹고 나서 비로소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유제품과 육류를 요리하고 먹고 씻고 닦을 때 냄비, 나이프와 포크, 싱크대, 수건 등도 엄격히 구분한다. 예로, 싱크대 한 쪽에선 유제품에 닿았던 식기를 씻고 다른 한 쪽에선 육류에 닿았던 식기를 씻는다. 요즘도 보수적 유다교계는 금기식품법을 철저히 지킨다. 반대로 진보적 유다교계는 이 법을 강요하지 않고 유다인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

예수께서 유다교이 금기식품법을 비판하신 짧은 구절이 마르코 7장 15절에 실려 있다.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힙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사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사람을 망친다는 명언이다. 자연의 음식물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사람됨을 좌우한다는 명언이다. 구약성서에 실린 계율, 조상 전래의 계율조차 철폐하는 폭탄선언이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자유를 누린다고 선언했다.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 멍에에 얽매여 있지 않도록 하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은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시오”(갈라 5,1․3).

오늘날 세계 가톨릭과 한국 가톨릭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딸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넘보는 조짐이 보인다. 질서 유지라는 명분으로 교회법이라는 전가(傳家)의 보도를 휘두르는 모양이다. 그래보았자 예수님과 바오로의 정기를 받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의기를 꺾지 못할 것이다.

4. 재물과 영생(마르 10,17-27)

① 마르 10,17-22에선 부자와 예수께서 재물과 영생 문제로 말을 주고받았으니 이 단락 양식은 대담사화라고 하겠다. 독일 성서학회에서는 대담사화 대신 사제간의 대담이라고 한다. 이 단락의 이야기 흐름은 퍽 자연스럽고 그 내용은 비감하다.

어 떤 부자가 예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여쭈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예수께서는 부자의 아첨을 일축하고, 십계명 중 대인관계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답변하셨다. 소년 시절부터 그런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부자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셨다. “당신에게는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21절)> 예수께서는 부자가 물욕에 얽매여 있는 것을 간파하시고 물욕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서는 추종을 택하라고 하셨다. 부자는 추종을 거부하고 재산을 지키기로 했다. 이로써 부자의 영생은위기를 맞았다.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단구를 상기해야겠다(마태 6,24: 앞의 5-2-3-6).

② 부자가 물욕 때문에 추종을 거부한 안타까운 이야기에 이어서, 예수와 제자들 간의 대담이 나온다.(마르 10,23-27). 예수께서 부자들은 구원받기 대단히 어렵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깜짝 놀란다. 예수께서는 한층 더 강조하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25절). 중동의 가장 큰 빔승 낙타가 가장 작은 구멍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럼 어느 (부자)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제자들이 반문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단정하셨다. “사람들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27절). 이 단락이 얼마나 마음에 걸렸으면 한국 최고의 갑부 고 이병철 회장이 죽기 전에 고 박희봉 신부에게 “부자는 왜 구원받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했을까?

어떻게 답해야 하나? 하느님과 마몬(재물, 돈)은 서로 인간에게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마태 6,24=루가 16,3). 그만큼 마몬은 인간을 사로잡는 에너지다. 여간 저항하지 않으면 마몬의 위력에 굴복하게 된다. 하느님은 상전으로 섬기고 마몬은 종놈으로 부려먹어야 참 신앙인이다. 그럼 마몬을 종놈으로 부리는 비결은? 독식, 과식하지 않고 나눔을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 기업을 해서 생긴 이윤을 종업원들에게 월급, 연금으로 나누어 주고 납세하고, 그러고도 여유가 있다면 재투자해서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부자 뿐 아니라, 우리네 보통 사람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마몬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누구나 모몬을 상전으로 받들지 않고 종놈으로 부리는 비결은 나눔이다. 이는 부자 보통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황금률이다. 누구나 마몬을 종놈처럼 부리면서 하느님을 상전으로 받들어야 구원을 얻는다. 하느님이 구원이시니까(27절).

또 한 가지 성찰, 마몬만 나눌 것인가? 재물 말고도 사람을 사로잡는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가? 사랑, 출세, 명예, 공부 등 많은 에너지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런 에너지를 많이 타고 난 사람은 그것을 독점 과점하지 말고 남과 나눌 의무가 있다. 독식, 과식하면 사람이 망가진다. 멸망이 따로 있나? 이게 멸망이지, 〈재물과 영생〉단락을 마무리하면서 읽을거리 둘을 소개한다. 프란츠 한케라메르트 지음, 김항섭 옮김,《物神》, 1999, 다산글방/ 암브로시우스 지음, 최원호 역주,《나봇 이야기》, 2012, 분도출판사.

5.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마르 12,13-17)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사람들이” 예수께 말을 건다. 형식상으로는 대담사화라 하겠는데, 내용상으로는 저들이 예수를 책잡으려는 심사가 이야기 밑바탕에 깔려 있으니 논쟁사화라 해도 무방하겠다. 바리사이들은 613가지 율법 조문들을 꼬박꼬박 지키기로 작심한 경건한 평신도 단체로 예수 시대에 6천명쯤 되었다고 한다.

헤로데 사람들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의 측근들이니 정치꾼들이다. 열심한 종교인들과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꾼들이 야합해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릴 궁리를 한다(13절). 잔뜩 아양을 떤 다음에 고약한 질문을 한다.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좋습니까, 그러지 말아야 합니까?”(14절). 세상에 이렇게 간사한 질문이 또 있을까?

주민세가 어떤 성격의 세금인가? 서기 6년 로마 시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스)을 폐위시키고 코포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주민세(인두세)를 거두어들였다.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누구나 로마 관리에게 내는 주민세는 로마 제국에의 예속을 뜻했다. 더군다나 주민세는 로마은전 데나리온으로 내야만 했다.

예수시대 데나리온 한 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함께 “티베리우스 황제,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라는 각명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모후 리비아의 좌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계율에 어긋나는 은전이었다. 그래서 북부 갈릴래아 가믈라 출신 유다가,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 백성의 통치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4댈 당파 가운데 하나인 열혈당의 기원이다.

저 간사한 질문에(14절)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 걸려들게 마련이었다. 주민세를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셨다고 하자,. 예수는 민족과 종교 배신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반대로, 주민세를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답변하신다면 로마 식민정치에 반대하는 반역자로 로마 총독에게 고발당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으실 때면 용케도 빠져나가신다. 자 저 간사한 질문에 어떻게 응수하시는지 감상하시라.

“왜 나를 떠보는 거요? 내게 데나리온 한닢을 가져오시오. 그것 구경 좀 합시다.” 예수께서는 데나리온을 받아들고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황제의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신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주시오.” 절묘한 답변이다.!

황제의 것은 무엇인가? 통념에 따라 황제가 로마제국에 유통시킨 데나리온이다. 그가 자기 것을 요구하니 돌려주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데나리온을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통치를 인정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적수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주시오”라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덧붙이신다. 이 첨언의 뜻은?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이 황제의 것인 것처럼,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창세 1,27)은 “하느님의 것”이다. 황제에게는 그가 유통시킨 데나리온 은화만 돌려주면 그만이지만, 하느님께는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힘을 다해서 자기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는 말씀이다.(12,30). 로마 황제가 높다하되 하느님 아래 하찮은 존재라는 뜻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정치의 상대성과 하느님의 절대성을 전제한 말씀이겠다. 정치의 자율성을 인정하되 그것은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말씀이다.

금력이 사람을 부리는 주인일 수 없듯이, 권력도 그럴 수는 없다. 멀리 갈 것 뭐 있겠나, 1923년 케말 장군이 정교 분리를 실현한 이래 터키는 시민 자유와 민권이 신장되고 있어 다행이다. 1979년 팔라비 왕조가 쫒겨 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워 신정정치를 하고 있는데 성직자들이 정치하는 꼴이라니 말이 아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보면 정교분리가 옳다. 정치는 정치대로 소임을 다하고, 종교는 종교대로 소명을 다 하면 세상이 편안할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안되니까 세상이 시끄럽다. 서로 간섭하면서 티격태격이다. 아마도 역사의 종말까지 그럴 것이다.

6. 수혼법과 부활 논쟁(마르 12,18-27)

사두가이들이 수혼법을 빙자해서 부활을 부정하는 질문을 한다(18-23절). 예수께서는 죽은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지 답변하시고(24-25절), 이어서 부활을 뒷받침 하는 구약성경 단락을 당신 답변의 전거로 제시하신다(26-27절). 사두가이들의 한 가지 질문에 예수께서는 두 가지로 답변하신 셈이다. 부활논쟁은 본디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으로 완결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 전거는 초기교회에서 덧붙인 첨언일 것이다. 사실 초기교회는 알맞은 성경 대목을 찾아내서 예수님의 언행을 뒷받침하곤 했는데, 이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2,25-26; 10,6-8; 11,17; 12,10-11).

사두가이들은 누구인가? 서기전 152년 하스모네 가문의 요나탄이 시리아를 상대로 싸워 이스라엘 백성의 독립을 쟁취하자 권력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왕권과 대제관직을 겸직했다. 이에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경건한 무리”가 반기를 들었다. 그들 가운데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바리사이당을 만들고, 일부 제관들이 뭉쳐서 에세네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관들과 예루살렘 유지들은 요나탄에게 동조하여 사두가이당을 만들었다. 서기 6년경에 결성되어 로마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한 열혈당까지 합치면 예수시대 이스라엘의 4대 당파가 된다. 사두가이들은 구약성경 가운데서 모세5경만 경전으로 인정한 나머지 죽은이들의 부활을 부정했다. 사실 부활신앙은 모세5경에는 없고, 서기전 2세기에 이스라엘에 생겨난 묵시문학계의 사조였던 것이다(이사 2619; 에제 37; 다니 12,1-3; 2마카 7,9-36; 12,41-46; 14,46). 사두가이들은 죽은이들의 부활뿐 아니라 천사들의 존재도 부정했다.(사도 23,8).

남편이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은 경우 과부는 고인의 형이나 동생과 결혼해야 한다는 수혼법(창세 38,8; 신명25,5-10)을 내세워 사두가이들이 예수께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한다. 기구한 팔자를 타고 난 여자가 칠형제와 차례차례 결혼했다고 가정한다. 이들이 모두 부활하는 경우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고 사두가이들이 예수께 질문한다. 현세와 내세의 삶이 질적으로 같다고 보았기에 저런 질문을 했다고 하겠다. 바리사이들조차도 현세와 내세를 같은 차원으로 여긴 사례가 있다. 서기 90년경에 가말리엘 랍비는 “부인들이 부활하면 매일 해산할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150년경에 엘리에제르 랍비는 “이스라엘 남자는 각기 아들만 60만 명씩 둘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의 답변(24-25절)을 새겨보자.

부활의 세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능으로 창조하시는 온전히 새로운 경지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면 장가가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현세적 실존과 부활 실존사이의 질적 차이를 주장했다. “자연적 몸으로 묻히고 영적 몸으로 부활합니다.”(1고린 15,4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태로 변화시키실 것이니, 곧 만물을 당신께 굴복 시키실 수 있는 권능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필립 3,21). 그러니 부활은 소생과는 아주 다르다 가사 상태로 잠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소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활은 이승의 삶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품에서 누리는 신령한 삶이다.

예수님의 답변(24-25절)을 출애 3,6으로써 뒷받침하는 결어(26-27절)는 초기 교회에서 덧붙인 첨언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애 3,6=마르 12,26)는 본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정체를 밝히신 말씀으로서, 하느님은 모세의 선조들이 섬긴 신이라는 자기 소개어다. 출애 3,6에는 부활신앙이 없었다. 그러나 신약성경 시대에 오면 출애 3,6을 재 이해했다. 곧, 선조들은 이미 하늘에서 복락을 누리고 있으며(루가 16,22-31), 장차 선조들은 부활하여 더욱 큰 복락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이 널리 퍼져있었다(마태 8,11-12=루가 13,28-29). 이런 사상적 맥락에서 출애 3,6을 재 이해한다면, 하느님은 당신 권능으로(마르 12,24) 선조들을 부활시키어 데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마르 12,27).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1890-1981)는 1957년 2월 26일 일지에서 〈허공이신 하느님과 짝지어 논다〉는 시제로, 이렇게 읊었다.

“나는 날 수 없는 몸, 땅에 붙어 닫히고 매달린 몸,
이 몸에 묻힌 얼이 꿈틀거린다.
내가 마음을 맑게 해서 하느님을 만나 날아오르면,
비로소 허공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나를 알아보리라.
나는 마음으로 허공이신 하느님과 어울려 뵙고 위로 올라가서
내 분수대로 기쁘게 놀리라.
이 몸을 누리다가 끝에 가선 눕게 되리라.
장차 나는 소요하는 삶을 누리리라.
지금 이 몸은 세상에 있지만 나는 올라가서 임과 함께 놀리라.”


7. 으뜸 계율(마르 12,28-34)

율사와 예수께서 으뜸계율을 주제로 주고받은 대담사화다. 유대교에선 일상생활에서 지켜야하는 계율이 무려 613개조나 딘다. 그러니 유대교가 원래는 예언자들의 종교였겠지만, 유배이후 시대가 흐를수록 계율의 종교로 변질되었고, 예수께서는 율법지상주의에 크게 반기를 드셨다. 율법 613개조 가운데서 248개조는 명령이고, 나머지 365개조는 금령이다.

이 잡다한 계율 가운데서 어는 계율이 가장 중요한지 논하는 풍조가 있었다. 서기전 2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씌어진 〈아리스테아 서간〉및 예수시대의 자애로운 율사 힐렐은 황금률(참조 마태 7,12=루가 6,31)을 으뜸 계율로 꼽았다. 유대인들이 예나 이제나 아침 저녁으로 바치는 신앙고백문(쉬마)에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으뜸계율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유대교 철학자 필로(서기전 20년경-서기50년)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사랑을 으뜸계율로 꼽았고, 서기 135년 로마인들에게 사형을 당한 아키바 율사는 레위 19,18에 따라 이웃사랑을 율법의 정수라고 했다. 이상 유대교 지도자들의 주장과 예수님의 주장은 형식상으로 볼 때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질적인 차이는 엄청나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으뜸 계율을 논하기는 했지만, 감히 613개조 계율을 으뜸 계율로 환원시킬 엄두를 전혀 내지 못했다. 으뜸 계율은 더 잘 지켜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613가지 세부 계율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잡다한 계율들을 사랑의 이중계명(마르 12,29-30) 또는 황금률(마태 7,12=루가 6,31)로 환원시키신 예수님과 아주 다른 점이라 하겠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마르 12,29-30=신명 6,4-5). 이는 유대교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외우는 신앙 고백문(슈마=신명 6,4-9; 11,13-21; 민수 15,34-41)의 첫 부분이다. 다만, 30절의 “네 생각을 다하고”는 신명기에 없는 가필이다.

둘째가는 계명은 이렇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르 12,31a=레위 19,18). 누가 이웃인가, 하는 문제로 여러 학설이 생겨났다. 예수시대에 사해 북서변 쿰란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자기네 회원만을 이웃으로 간주했다. 당시 극소수 해외 유대인들은 온 인류가 이웃이라고 했다. 유대인들 절대 다수는 예나 이제나 동족만을 이웃으로 여긴다. 예수님이나 1세기 그리스도인들 절대 다수는 온 인류를 이웃으로 본다(갈라 4,28; 1고린 12,12-13; 로마 13,9; 야고 2,8). 율사는 예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으뜸 계명으로 꼽으신 것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도 율사에게 화답하신다. “당신은 하느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34절). 참으로 모처럼 만나는 흐뭇한 정경이다.

이제 이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안동에서 겪은 일을 적겠다. 안동에서 1970년대 초반에 성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예수께서 설파하신 으뜸계율은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강연장을 나서는데 유생 한분이 나에게 충고했다. “하느님사랑”이라니 몹시 귀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인데, 어찌 지존이신 하느님을 치켜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느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애주애인”(愛主愛人)이라고 하지 말고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했다. 예수의 논쟁, 대담사화 전반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박태식 신부가 지은《예수의 논쟁사화》(2009, 늘봄)를 정독하기 바란다. 쉽고 또렷하고 구수하게 쓴 명저다.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