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에서 순교한 7명의 수도자 이야기.. 영화로 만들어져
자비에 보부아 감독의 <신과 인간>(Of Gods and Men)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난다면 이미 알제리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겨냥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테러리즘의 희생자가 된다면, ‘나의 생명은 하느님과 이 땅에 바쳐졌다’는 것을 나의 공동체, 나의 교회, 나의 가족은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1996년 5월 21일 알제리에 있는 엄률시토회(일명 트라피스트회)의 7명의 수도자가 이슬람구국전선의 무장그룹(GIA)에 의해 처형되었다. 위 글은 무장한 알제리 반군 ‘산의 형제들’이 처음으로 수도원에 찾아왔던 1993년 12월 24일 성탄절 직후에 알제리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원장이었던 크리스티앙 신부가 작성한 <작별이 시간이 다가왔을 때>라는 유언장의 일부다.

크리스티앙 신부는 “이 잔인한 이별에서 하느님께서 이방인이 아니셨음을 알아주길” 기대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은 특별한 순교자가 아님을, 이름도 없고 관심을 끄는 일도 없이 죽어간 많은 이들의 무참한 죽음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들의 생명이 다른 평범한 이들의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덜 가치로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순교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다 할지라도 이 죽음의 책임을 알제리인들에게 지우지 말 것을 당부했다.

 

▲크리스티앙 드 셰르줴 신부가 성무일도를 바치는 모습, 그리고 그의 유언장. 

 

나의 눈길을 아버지의 눈길 안으로 잠근다

무슬림 안에서 섬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가난과 노동과 기도로 하느님의 현존을 알렸던 이들 수도자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영화가 한 편 만들어졌다. 자비에 보부아 감독이 만든 <신과 인간>(Of Gods and Men)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아틀라스 수도원 형제들의 삶은 사람과 하느님이 더불어 창조해 가는 드라마였다. 크리스티앙의 유언장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분께서 바라보시는 그대로 그분과 함께 바라보기 위하여, 나의 눈길을 아버지의 눈길 안으로 잠근다”라고. 그러니 그는 그분과 더불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고 그렇게 살았다.

트라피스트회에 속한 알제리 티비레네의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은 철저한 관상수도원이다. 그러나 사실상 수도원은 수도원 안에만 있지 않았다. 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알제리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며, 그 결과 가톨릭교회는 알제리에게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아무도 알제리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수 없었다. 아틀라스 수도원은 관공서와 타협 끝에 남아 있었지만, 자기 소유의 360ha의 땅을 국가에 넘겨주고, 남은 14ha 중에서 경작이 가능한 10ha 안에서 야채밭과 과수원, 라벤더, 양봉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는 알제리 전체가 일종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주변은 온통 무슬림에 둘러싸인 채 외국인인 7명의 수도자들만이 그리스도교의 현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행히도 아틀라스의 형제들은 자신의 삶을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 그 본질적인 것이란 건물도 사업도 아닌 수도자들 사이에, 또는 무슬림 이웃들과 나누는 ‘형제적 친교’였다. 이를 두고 크리스티앙 신부는 “오로지 믿음만이 우리의 생존과 현존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그 한계에까지 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뤽 수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비그리스도교적 분위기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그들은 수도원을 찾아오는 배고픈 이에게 물과 빵을 나누어 주었고,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수선할 것이 있으면 고쳐주고, 문맹인 이웃들의 서류를 대신 작성해주고, 편지도 써주었다. 수도자들은 가난한 무슬림 이웃들과 친구처럼 지냈으며, 차츰 무슬림들도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로 여기게 되었다. 뤽 폴 도 쉬에르 수사는 의사로서 프랑스 친구들이 보내주는 약으로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를 손수 돌보기도 했다. 뤽 수사는 그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환자는 군인도 반란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병자일 뿐. 여기서는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늘 말해 왔다.

한 방문객은 아틀라스 수도원에서 받은 인상을 이렇게 남겨두었다.

“도로에 소용돌이치는 흙먼지, 거대한 히말아야 삼나무 아래 일꾼 몇 사람이 정오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양치는 벌거숭이 아이들과 산쪽으로 가지 않으려는 양떼들, 현관 앞에는 오래된 우물 하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그 시원함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 때 신부님께서 나를 보시고는 서늘한 객사로 데려 가신다. 아틀라스 성모 수도원은 가난하고 소박한 수도승원이다. 어디를 보나 느껴지는 것, 만나는 것은 겸허함이다. 인위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지금 필요한 것만 있다. 그들은 사막의 변두리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잿빛 담벼락에는 정치 구호문이 지저분하게 나붙어 있다. 정원에는 <평화>라고 새겨진 흰색 나무 십자가가 서 있다.”

아틀라스 수도원은 “비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실존이라는 순수한 영적 특성을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 포도주 창고를 개조해 만든 수도원 성당에서 공동기도를 알리는 종을 치면, 무슬림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일을 하는 무에친(Muezzin)은 무슬림들이 하루 5번 바치는 기도시간을 알린다. 이들은 이 종소리와 기도가 어떤 연대감 속에서 바쳐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의 하느님이 곧 우리의 하느님이심을. 그리고 이 기도는 이 지역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과 노동, 아픔과 기쁨을 끌어안는 기도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와 샤를 드 푸코의 땅

 

▲자비에 보부아 감독이 만든 <신과 인간>(Of Gods and Men), 2011

영화 <신과 인간>을 보면, 크리스티앙 신부의 책상 위에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와 이슬람교의 경전 <쿠란>이다.

프란치스코는 1219년 제5차 십자군 전쟁 때 에집트의 술탄(왕), 말리크-알-카밀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이교도로 하여 잔혹하게 학살하곤 했는데, 프란치스코는 이런 태도를 복음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믿었다. 초기 300년 동안 교회는 사람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사랑과 용서였기 때문이다.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게 예수가 전해준 계명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전쟁 한복판에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적에게 찾아갔고, 그들을 형제처럼 사랑했다. 그에게 유일한 규칙은 ‘복음’뿐이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무슬림 문화를 존중했으며, 마호멧을 인정하고 술탄의 종교를 모욕하지 않았다. 그는 이슬람종교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같은 하느님을 숭배하므로 존경심을 표현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여행하면서 무슬림들이 저녁에 전능한 신을 찬미하기 위해 엎드려 기도하는 관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술탄에게서 선물받은 ‘뿔나팔’을 귀하게 여겨 간직했는데, 무슬림들이 정해진 기도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며 사람들을 모을 때 사용하던 나팔이었다. 이 뿔나팔의 종교적 의미를 가슴에 새겼던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자신이 사람들을 기도에 초대할 때도 이 뿔나팔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충분한 존중심을 표현한 것이다. 술탄은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겸손한 태도에 감복되어 프란치스코를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보살펴주고 치료해주고 석방시켰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서로 가까워진다

 

▲<마지막 공동기도>, 프랑코 콜론의 목판화. 아틀라스의 일곱 형제들을 기념하는 일곱 화판 가운데 하나. 1977년.

크리스티앙 신부는 군복무 중에 알제리에서 자신을 변호해주고 대신 참수된 무슬림 친구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알제리에서 첫 서원을 하면서 쿠란과 아랍어를 공부했다. 그는 무슬림의 종교심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늘 기도하는 그들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1979년에 참여한 <리바트 에사 살람>(Ribat es Salam, 평화의 끈)이란 모임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 회원들이 일 년에 두 차례 아틀라스에 모여 기도하고 명상했다. 이 가운데 한 수피(무슬림 수행자)가 어느 날 상징적인 그림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다. 한쪽에는 무슬림이 하느님께 올라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올라간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서로 가까워진다.”

아틀라스 수도원은 알제리에서 조심스레 토착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수도원 객사 기도소에는 베르베르 양탄자와 달필로 쓴 쿠란 구절이 쓰여있는 패널을 걸어두었고, 때때로 주님의 기도와 마니피캇 등을 아랍어로 염송하기도 했다. 특히, 무슬림 친구들과 함께 성무일도와 미사성제를 봉헌하기도 했던 장소인 성당에는 무슬림의 감성을 고려해 십자고상 대신에 프란치스코의 유명한 다미아노 십자가와 비슷한 십자가를 걸어두었는데, 십자가 아래서 마니피캇을 부르는 마리아와 심홍색 망토를 입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그리고, 명패에는 아랍어로 “그분은 부활하셨다”라는 구절을 새겨넣었다.

그래서 크리스티앙 신부는 프란치스코처럼, 샤를 드 푸코 성인처럼 “주님, 저를 무장해제 시키시고 그들도 그렇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1993년 성탄절 전야에 수도원에 침입한 이슬람구국전선의 반군 ‘산의 형제들’이 크리스티앙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그냥 철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티앙 신부는 “여기는 평화의 집”이라면서 무기를 놓을 수 없으면 수도원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초대한다. 반군 대장인 알리가 의약품을 모두 내어놓으라고 다그치자, 크리스티앙은 지역 주민들에게 필요한 약품밖에 없음을 알리고 거절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우리는 검소해요. 직접 키운 걸 먹고 살죠”하면서 코란을 인용하며 말한다. “쿠란을 아시죠? 믿는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 중에 사제와 수도사가 있을 것인데, 그들은 누추할 것이다.”

결국 대장 알리는 이날이 ‘평화의 왕자’인 예수가 탄생한 밤이란 걸 알고 사과하며 크리스티앙 신부와 악수를 나눈다. 이날 밤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자들은 이런 밤 기도를 바친다.

▲ 성당에 걸린 십자가와 순교한 7명의 수도자들. 이들에 관한 책이 불휘출판사에서 200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을 편역한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창원시에 있는 데, 지난 수년 간 관상생활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과 더불어 수정만 STX유치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아틀라스 수도원의 형제들> 표지사진
“이제 밤이 내리네,
탄생의 위대한 밤이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라
스스로 드러내는 사랑뿐이네

모래와 물을 갈라놓으심으로
한낮에 거하실 이 땅을
하느님은 요람처럼 마련해 주셨네

밤이 내렸다네
팔레스타인의 행복한 밤이
아기 예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라
아기 예수의 성스러운 생명뿐이네

우리의 살로부터 살을 떼내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막을
영원한 봄의 땅으로 바꿔주셨네

밤이 내렸다네
기나긴 밤 속을 우리는 나아가고
이 장소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라
허물어진 희망의 이 장소뿐이네
우리들의 집에 들르신 하느님은
불이 떨어져 내릴 이 땅에
덤불을 마련해 주셨네”

 

우리는 순교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반군인 ‘산의 형제들’이 다녀가고 난 뒤에 아틀라스 수도원의 형제들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 그중에는 “우리는 순교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군부가 장악한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신변을 보장할 수 없으니 프랑스로 떠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비록 종교적 신념은 달랐지만, 오랜 벗이었으며 보호자였던 수도자들이 이 지역을 떠나고 난 뒤에 찾아올 두려움을 호소했다. 그들은 마음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부도 반군도 믿지 않았다.

연이어 외국인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서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수도자들도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산에 있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발간한 <아틀라스 수도원의 형제들>(불휘 출판사, 2000)이라는 번역서에서는 당시 그들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체험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작은 행동이 가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지 특히 우리가 그것을 매일 반복해야만 할 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목요일에 형제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한 번으로 지나가지요. 그러나 그것을 매일 반복해야만 된다면? 또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행해야만 한다면? 어느 날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한꺼번에 도매로 넘겼지요. 그러나 그분이 그것을 소매로 조금씩 가져가시려고 할 때는 몹시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처럼 앞치마를 두르는 일은 목숨을 바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진지할 수 있습니다. ... 반면에 그와 반대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쩌면 앞치마를 두르는 것만큼이나 쉬울 수 있습니다”

 

▲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크리스토프 르브레톤 신부가 갈등하며 기도하고 있다.

 

하느님께 온전히 복종함으로써 얻은 자유

영원한 봄이 다시 사막으로 변할 것 같던 1996년 5월, 아틀라스의 형제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영화에서는 그 밤의 만찬을 위해 뤽 수사가 와인을 꺼내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식당에서 눈물과 웃음이 교차되면서 수도자들은 ‘천국을 위해 세상을 다 버린 자의 심정으로’ 평화를 만끽한다. 그들은 “폭력에서 벗어난 평화의 경계선을 찾아가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고백한다.

부패한 군부의 보호도 사양했던 수도자들은 이렇게 전한다. 자신들의 혼란과 약함을 고백하면서도, 믿음 안에서 희망의 지평을 발견한다.

“우리의 무력함과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권력에 기대지 않고 남과 교류하라는 권유이며 절박한 요구이다. 나의 약함을 알아야 남의 약함을 알고 그리스도를 따라 남과 나를 견뎌낼 수 있다. 그런 태도가 우리의 임무를 개선한다. 나약함 자체는 미덕이 아니지만 그것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세공되어야 할 우리 존재의 본질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도의 나약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신비와 영혼의 힘 속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무기력도 체념도 아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며 힘과 권력의 유혹을 고발함으로써 정의와 진실에 헌신토록 우리를 부추겨준다.”

수도원은 산과 평지, 국가 보안전투부대와 하느님나라를 폭력으로 강탈하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을 취소했다. 그들은 ‘꿋꿋한 희망의 문지기’로 끝까지 이곳에 머물기로 작심했다. 그들은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평화가 가능함을 증언하는 자로 남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 인질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크리스토프 신부가 12세기 영국 순교자 토마스 베케트의 말을 적어서 성당 입구에 걸어놓은 말 그대로였다.

“그리스도교적 순교는 우연이 아니다. ... 참된 순교자는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의 뜻 안에 태워 버림으로써 자신을 잃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찾은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 온전히 복종함으로써 자유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

 

▲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아틀라스 수도원 원장인 크리스티앙 신부가 수도원에서 채취한 꿀을 시장 좌판에서 팔기 위해 나르고 있다.

 

교회는 무슬림들을 존경하고 있다

크리스티앙 신부와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수도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화해의 정신을 고스란히 구현한 것이다. 자칫 선언에 그칠 공의회 문헌을 생동하는 진리로 육화시킨 것이다. 공의회에서 반포된 <교의헌장>은 십자군전쟁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갈등을 종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교회 사명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교의헌장>은 16조에서 비록 비그리스도교인이라 해도 “누구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들은 것을 행동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슬람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신실하고 그리스도교에 가깝다. 때문에 <교회헌장>에서도 이슬람교를 유대교 다음으로 하느님 백성의 서열에 두고 있다.

더욱이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는 “교회는 무슬림들을 존경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비밀한 결정에도 순종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언자로 공경한다. 동정 성모님을 공경하며 때로는 그의 도움을 정성되이 청하기도 한다. 또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고 갚아주실 심판날을 기다린다. 여기서 그들은 윤리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로 또는 애긍시사와 재계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의회는 역사과정에서 서로 원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를 잊고 서로 이해하며, 모든 이에게 사회정의와 공동선,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옹호해주고 촉진시키기”를 요청했다.

 

▲지난 2011년 6월 25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수정 마을에 있는 수정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수정만매립산업단지 문제가 매듭된 것을 축하하는 감사미사와 마을 잔치를 열었다. 

 

한국교회, 주민들과 연대하는 관상수도자들: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 밀양 가르멜 수도원


한국교회 안에서 예전에 없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관상수도원의 수도자들이 그 지역의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지역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틀라스 형제들과 같은 수도회인 마산교구에 있는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도원’의 관상수도자들은 지난 수년 동안 수정마을 주민들과 연대해 STX의 수정만 매립산업단지 조성을 지난 2011년 6월 백지화시켰다. 또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캠프 캐럴 미군기지의 고엽제 매립 의혹과 관련해 왜관주민들과 연대했으며, 밀양 가르멜수도원은 경남 밀양을 지나는 765㎸ 송전선로 공사를 반대하며 탈핵운동의 차원에서도 주민들과 연대하고 있다. 이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 역시 알제리처럼 가톨릭신자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들 모두 하느님이 사랑하시던 '가난한 이들'이었다. 

아틀라스 수도원의 크리스티앙 신부는 유언장 말미에 자신들이 행동하는 이유를 “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그대 안에서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도자들은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분을 알아본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천국에서 우리가 서로 복된 도둑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모두가 이 지상을 건너는 복된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죽음과 고통도, 가난도 종교도 우리들을 하느님 안에서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