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와 농업> 기획은 비단 FTA가 철회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문제의식은 그것에서 시작됐지만 궁극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은 농사와 밥상을 차리고 먹는 일련의 과정을 회복하는 일에서부터 우리 삶의 근본적 '회심'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단지 산업으로서의 농업을 살리고, 몸에 좋은 웰빙식품을 찾는 '상업적 논리'을 떨쳐야 한다. '생명'에 대한 가치를 새로이 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의 감수성을 이 시대안에서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실제로 삶의 틀을 바꾸고, 도시의 밥상을 새롭게 차림으로서 농민을 살리고 피폐해진 세상을 회복시키는 방법에 대해 접근해 볼 계획이다. 이번 글부터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대학에서 농촌사회학을 가르치는 정은정(아녜스) 씨가 '새로운 밥상'에 대해 연재를 시작한다.

'죽이는' 맛이 넘쳐나는 세상 

‘식객’의 작가 허영만이 말했듯이 한국 사람들은 기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죽인다’라고 표현한다. 살기 위해 먹기도 하고 먹기 위에 살기도 하지만 ‘죽을만큼 맛있다’는 그 말이야말로 음식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원초적인 의식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맛있는 것을 원없이 먹다가 그 자리에서 딱!죽어버리는 인생. 결코 불행하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람 죽이는 맛이 도처에 널려 있어서 문제다. 어떤 음식들은 사람을 한방에 죽이고 대부분의 음식들은 서서히 죽인다. 상한 음식을 먹고 단체로 배앓이를 하는 학생들 소식이나 식당의 위생문제, 중국산 식재료의 안전성 문제, 식품 첨가물과 같은 ‘식품안전’ 문제는 뉴스의 단골 메뉴다. 하지만 이런 먹거리 파동은 터지는 동시에 분노가 들끓지만 워낙 새롭고 더 ‘센 놈’이 오기 때문에 금방 묻히고 만다. 식품안전문제는 가장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사회적 문제이지만 고통은 개인에게로만 떠넘겨져 있다. 이런 식품사고가 일어나면 ‘먹는 것으로 장난 친’,  몇몇 못쓸 사람들의 문제로 넘기고 만다. 그리고 업자들이나 생산자들의 비윤리적인 행위로 몰아세우면서 제대로 챙겨먹어야 하는 것도 ‘개인’의 책임이고 먹거리 안전을 지켜야 하는 것도 ‘개인’의 몫이라고 몰아세운다.

개인의 책임.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며 먹거리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품안전 문제는 이슈로라도 드러나기 때문에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 그 맛들의 실체가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광우병 문제가 혼자 막아낼 수 있는 것이던가. 작년 한국사회를 살풍경으로 장식했던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어땠는지를 돌이켜보면 ‘죽고’, ‘죽이는 맛’이 얼마나 만연한 사회인지를 알 수 있다.   

다큐멘터리 보는 재미가 드라마 보는 재미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MBC의 ‘눈물 시리즈’ (남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를 보면서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문제를 실감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느끼는 기후변화가 물폭탄 수준의 집중호우와 폭설 정도지만 실제로 기후변화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식량이다. 강원도에서 사과가 나오고 열대과일 재배가 가능해졌다는 소식들은 그냥 웃어 넘길 일은 아니다. 기실 따지고 보면 먹고 살만해 졌으니 안전이나 영양을 따질 수 있게 됐지만, 식량수급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생존의 문제다. 이는 몇몇 아프리카나 북한과 같은 저개발국가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넘쳐나서 바다에 빠뜨리기까지 한다던 식량도 기후변화에 맞닥뜨리면서 그 수급이 불안정해졌고, 식량수출국이 수출을 중단하기도 하며, 좀 산다 싶은 나라부터 식량 확보에 나선다.

자연이 분노하고 있으니 이제 잘사는 나라든 못사는 나라든 상관없이 식량문제는 가장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투자전문가들이 지목하는 가장 좋은 투자처가 곡물시장이겠는가. 최근 먹거리 문제에서 워낙 안전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양’의 문제를 종종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식품문제를 명확히 보기 위해서 식량문제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세상이 좋아져 가스불 하나 당기지 않고도 끼니를 때우는 일이 어렵지 않은 시대이지만 이 끼니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라면 이는 지나친 비약일까.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넘치게 사먹을 수 있는 먹거리 산업화 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이렇게 세계화된 식량의 수급구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윗 세대에서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기를 먹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쌀밥에 고기’라는 그 열망을 실현시킨 것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산업화된 농업에 힘입은 것이고 이런 육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대형화된 축산업이다. 축산업은 또 어떻게 가능했는가. 단연 수입 곡물사료로부터였다. 농가에서 소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꼴을 먹여 키우고 쇠죽을 쑤어 먹이려면 한 농가가 감당할 수 있는 소는 두어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에서 생산되어 배로 실어오는 사료와 항생제만 있다면 수백 마리도 너끈히 키워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든 불판에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것이다.

어디 가축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식품들은 현대의 대량 농업생산에 힘입은 것이며, 대량생산과 유통을 주도하고 있는 몇몇 글로벌농식품기업들에 의존하고 있다. 먹는 것만 세계화 되었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광우병이나 조류독감 같은 그 위험들도 ‘세계화’ 되고 말았다.

그나마 ‘우리집은 국내산 식품들을 주로 소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마 과일과 채소 때문이다. 글로벌화된 먹거리 구조속에서도 과일과 채소는 신선함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공되지 않는 과채류는 국내산 소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수송수단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최근 수입되는 과채류가 늘어나고, 높은 물가로 몸살을 앓을 때는 수입산 농수산물로 시장물가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는 점도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내의 과채류 시장의 경우 그 유통구조에서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이 중점적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생산된 농산물을 산지상인들이 수집한다. 이를 가락동시장에 위탁하면 경매를 거쳐 소매상들에게 넘어간다.생산자 입장에서는 포장비, 위탁비를 빼고 나면 실제로 수령하는 금액은 많지 않고 종종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 때문에 차라리 밭을 갈아엎기도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여러 유통과정 중에서 ‘신선함’은 증발하고 농민들의 출하가격보다 훨씬 높아진 값에 구매하게 된다. 실제로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인데도 일단 가락동을 거쳐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다른 형태로는 대형 마트나 대형 식품업체들과 산지의 농민 생산자가 직거래 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고 얼핏 직거래 방식이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대기업과 농민의 직거래는 농민은 물론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식코너에서 입과 마음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지갑’이 털리고 있는 셈이다. 깔끔한 매장과 포장기술은 기업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닌 것이다. 지금 당장 재래시장에 가서 시금치 한단을 집어 보시라. 그리고 대형 마트에서 파는 시금치의 무게와 품질, 가격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될지니.

생산자 입장에서도 대형마트나 대형기업과의 거래는 가장 위험한 거래이기도 하다. 대형마트는 늘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직거래를 통해 최저가격에 소비자에게 공급한다고 내세우면서 농산물을 ‘덤핑’할 때가 있다. 또한 대기업들은 생산자를 장악하고 자신들의 이익에서 벗어나면 언제든지 계약해지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생산자들은 아무리 가격을 후려치고 불공정한 거래가 이뤄져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결국 마트 중심의 생활문화에서는 농민도 소비자도 모두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살리는 맛을 찾아서 

가족과 식구라는 말을 함께 섞어서 쓰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어서 함께 밥을 먹으면 가족이나 진배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가족이란 본래 밥상에 함께 둘러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대로 된 밥상 차리기가 만만치 않다. 생산자는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 소비자를 야속하게 여기고, 소비자는 생산자를 신뢰할 수 없다. 또한 넘쳐나는 ‘불량식품’을 선별하는 것도 힘들고, 요리는 솜씨가 없어서가 아니라 할 시간이 없다.  사람들은 이제 요리를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맛집’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고, 무엇보다 가족들과 함께 먹을 시간도 이 사회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인지한다 하더라도 먹거리를 둘러싼 ‘음모’를 일일이 알아내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들의 수완을 당해낼 재간도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먹고 살다 그냥 죽을 것인지를 되묻는 것.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맛은 과연 없는 것인지 살펴보자는 제안으로 이 글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를 ‘대안 먹거리 운동’이라도 부르고 ‘대안 소비 운동’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다. 다만 제대로 된 밥상을 차리는 것은 정신을 차리는 일과 같다는 것이니, 앞으로는 정신 차린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밥상을 꾸려가는지 그 사례들을 짚어볼 예정이다. (계속)
 
정은정 (아녜스, 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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