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에서 교회 여성활동가 김선실 선생은 여성신학자 빅토리아 루(Victoria Rue) 박사를 소개하면서 당시 ‘여성부제’인 그녀가 그해 7월 25일 ‘여성사제’로 서품 받은 것을 전함과 아울러 이것의 의미를 교회일치와 쇄신 차원에서 나름대로 평가한 바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한국천주교회 언론에서 그 동안 물밑에서만 쉬쉬하던 여성사제 논의를 물위로 끌어 올린 첫 글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 여성사제 서품이 현 교회법상 ‘불법’이지만, 말하고 들을 권리가 있는 모든 신자들을 위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빅토리아 루는 예상대로 여러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300여명의 참가자에 둘러싸여 사제로 서품받았다. 성 로렌스 씨웨이 강변의 넘실거리는 물위에 배를 띄어 놓고 그 안에서 ‘여성주교’ 2명의 집전으로 빅토리아를 포함한 사제 4명과 부제 5명이 여성 성직자로 태어났다.

교황청, 여성사제 문제에 민감한 대응:
"서품을 받은 여성들은 '교회밖'에 있으며 따라서 파문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선실 선생이 전한대로 지난 2002년 6월 7명의 여성이 사제로 서품 받았으며 그 가운데 2명이 한 유럽인 주교에게서 주교품을 받았다. 바티칸은 얼마 뒤 이 여성사제 7명을 모두 파문시켰다.

교황청이 이 문제를 이렇듯 민감하고 혹독하게 대응했음에도 2005년에 다시 9명의 여성성직자가 나왔고(CNS에 따르면 비슷한 시점에 프랑스에서도 55살 된 한 여성이 사제로 서품됐다고 한다), 또 ‘로마가톨릭 여성사제 운동(Roman Catholic Womenpriests)’에 따르면 60여 명이 여성사제를 위해 공부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여성신학자도 있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 종사자도 있어서 이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시켜버리는, 가장 가혹하다면 가혹한 파문을 예상하면서도 이런 운동을 벌이고 있는 데 대해 밖에서 보는 시각은 실로 다양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여성사제 서품에 대한 교황청 입장은 단호하다. 고 요한바오로 2세는 1994년 “교회는 여성을 서품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고 이어 1998년에 사목서한을 발표해 모든 여성의 서품은 “무효”이고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가 있더라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신자들은 여성사제와 같은 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재강조했다.

교황의 이런 태도는 서품을 받은 여성들은 “교회밖”에 있으며 따라서 파문은 정당하다는 점을 아울러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5년 7월 25일 서품식에 참가한 버지니아 라폰드(Virginia Lafond)는 캐나다 가톨릭언론 <캐나다 그리스도교>(Canada Christianity.com)에게 교회가 여성을 서품할 권한이 없다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다면서 그 진의가 뭔지 확실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여성평등 가톨릭네트워크(Catholic Network for Women's Equality)’ 회원인 그녀는 여성사제에 대한 교황의 선언은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 3장 28절에서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평등정신을 발견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여성도 남성처럼 사제직을 통해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사제 서품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교회쇄신'

서품식에 앞서 7월 22-24일 ‘여성사제 서품을 위한 세계운동(WOW, Women's Ordination Worldwide)’은 캐나다 오타와에서 여성사제 서품을 지지하는 에큐메니컬 워크샵을 열었다. 400여 명의 참가자 가운데 한명이자 워크샵 진행자였던 빅토리아 던(Victoria Dunne)은 여성사제서품의 의미와 지향을 분명하게 밝혔다.

“여성사제 서품은 출발에 불과하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교회쇄신에 있다. 기존 교회구조 안에서 여성서품을 시작한다는 것은 커다란 시련이지만 여성은 이미 교회를 바꾸고 있다. 여성사제 서품이 기존 교회구조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그러나 로마가 대화에 문을 열지 않는다면 전체 교회에서 점점 더 소외될 것이다.”

이렇듯 던은 여성사제 서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면서 이를 교회쇄신의 맥락에서 제기하고 있다.

던과 마찬가지로 빅토리아 루도 여성사제 서품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반대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등한 초기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2005년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 교회일치 모임에서 그녀는 “(파문같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굳이 여성을 사제로 서품할 필요가 있는가? 여성사제 서품은 성직중심의 교회를 더 가속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제도교회가 반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는가?”라는 여러 물음에 대해 차근차근 소신있게 대답했다.

"공동체가 권위를 인정하는 한 나의 사제직은 유효한 것"

그녀는 초기교회 예를 들면서, 당시에도 여성부제가 있었지만 지금 남성 성직자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봉사하고 섬기는 “종의 자리”였다면서 특정한 사람들만이 성직을 독점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가 더욱 발전해 나간다면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이 비록 다양한 직분을 맡고 있지만 사제직과 어떠한 차별없이 동등한 제자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공동체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사제직은 존재할 수도 또 사라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빅토리아는 또한 자신도 사제서품을 받은 뒤에 파문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비록 제도교회에서 파문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교회이기에 아무도 우리에게서 우리 교회를 빼앗아 갈 수 없으며, 우리 공동체가 그 권위를 인정하는 한 나의 사제직은 유효한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값싼 감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얼마 뒤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수녀원을 박차고 나와 신학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고 ‘컴잉아웃’ 하면서 교회 안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소수자 중의 소수자’가 됐다.

또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이 “교회에서 동성결합은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문헌을 발표하자 그가 미사를 집전하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찾아가 침묵시위를 벌이다가 그의 신고로 경찰에 의해 성당에서 질질 끌려 나오기도 했다. 그녀의 눈물은 그녀가 얼마나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철저하게 투신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여성사제가 남성사제보다 낫다는 판단은 지나친 단순화 위험도 있어
..남녀평등의 정신으로 접근해야

그러나 빅토리아의 이런 수난과 눈물은 분열과 양극화로 상징되는 고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통치 특징을 반영한 한 예에 불과하다고 본다(요한바오로 2세는 재위 25년 동안 교회를 극단적인 성직자의 교회로 재조직함으로써 결국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분열과 양극화를 낳았으며, 또 한스 큉이 4월 7일자 <르몽드>에서 말한 것처럼, 성모 마리아를 지극히 공경하고 여성들에게 순결을 설교하면서도 교회 내 여성인권이나 여성사제 문제는 외면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극단적 이중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따라서 여성사제 서품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회가 이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쇄신이라는 말에 값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이 사제가 된다고 해서 여러 면에서 남성 사제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보인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 자식을 낳고 기르고 하는 여성성, 곧 ‘돌봄의 영성’이 남성적 교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적으로 땅과 자연에 가까운 여성이 그만큼 ‘지상적인 것’에 더 애착을 가질 수도 있고 따라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개신교 일부 교단에서는 가톨릭처럼 교회를 임기제로 돌아가면서 맡게 하는데, 이동할 즈음이면 목사가 아니라 목사 부인들이 나서서 ‘좋은 자리’를 놓고 갈등이 심하다고 하는데, 이웃의 예이기는 하지만 시사점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가 여성사제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갈라디아서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며, 여기서 사제직도 예외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평등정신이야말로 여성사제 문제를 접근하는 키워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 2005년에 황경훈 씨가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필자의 허락을 얻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게재합니다.

황경훈 /바오로, 우리신학연구소 부설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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