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말이 있다. 씨 과일은 다 먹지 않고 남긴다는 말로 당대 혼자만의 욕심을 버리고 자손과 그 후대에게도 복을 짓도록 기여하는 게 사람의 도리라는 교훈이다. 정치적 양극화로 보수-진보 갈등과 투쟁이 극심한 오늘, 윤석열 정부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보수·진보가 다 인정하고 있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마저 손질하겠다고 나섰다. 윤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통일”이라며, 통일부 업무보고 때는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에 근거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 한 명 한 명의 자유를 확대하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 취지를 살려 윤 정부의 자유주의적 철학과 비전을 반영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수정안을 만들겠다고 한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1989년 9월 노태우 정부가 발표한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하에 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국가완성의 3단계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정책이다. 1980년대 후반 재야·학생의 격렬했던 통일운동을 수렴하고, 냉전구도 해체의 국제질서 변동에 대처하기 위해 내놓은 노태우 정부의 야심작이었다. 이 정책은 통일 원칙과 방법론까지 갖춘 안으로서 분단 이후 최초의 체계적인 통일방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 박정희 정부의 ‘선건설 후통일론’이 이름만 통일론이지 실효성 있는 방법론도 없는 사실상 민간의 통일 논의 탄압정책이었음을 감안할 때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이 정책은 당시 야당과 재야를 포함해 광범위한 국민 여론을 수렴했기에 발표 후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이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보수-진보 간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 통일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방안의 내용 중 ‘남북연합’이 관심거리이고 논란의 대상이었다. 남북연합은 이후 역사상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었던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통일의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 합의문 2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이다. 당시 북측은 합의문 1항 "우리민족끼리"를 중요시했고, 남측은 합의문 2항을 강조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연합제안'이 바로 남북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남북연합이란 유럽연합(EU)이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같은 '국가연합'을 지칭한다. 국가연합을 가동시키는 핵심 장치는 '정상회의'다. EU는 1년에 두 번, ASEAN은 한 번 정기 회의를 열지만 현안이 발생할 경우 수시로 임시 회의를 개최한다. 정상회의에서 결정된 합의사항은 외상회의를 거쳐 구체화해 각국에서 정책화된다. 2018년 판문점에서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에서도 '남북연합'이 가동되는 게 아니냐는 기대가 일었다. 남북연합은 1단계 화해 협력이 진전된 상태에서 제도화될 수 있는 2단계 상태지만, 실제 남북 간 적대관계를 관리하며 교류·협력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핵심 구상이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기본 정신은 남북 간 교류·협력을 바탕으로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1990년대 풍미했던 ‘기능주의’(functionalism)가 작용하고 있는데, 유럽통합 과정에서 과학기술·경제·사회적 분야에서부터 먼저 교류·협력을 시작하면 점차 파급효과(spill over)가 일어나 민감한 군사·정치 분야까지 통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견해다. 여기서 파급은 풍요한 곳에서 빈곤한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북한은 줄곧 이 정책을 흡수통일로 보고 경계하고 비난해 왔다. 이 방안의 추진 과정에서 최대 난관은 정경(政經) 분리를 실천할 수 있느냐 여부였다.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남북 간 교류·협력이 끊임없이 진행돼야 하는데, 그간 군사·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다. 김대중 정부 외에는 정경 분리를 제대로 실천한 정부가 없었다. 결국 이 정책은 남북 간 군사적 충돌과 북핵 문제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거치며 교류·협력이 전면 중단됨으로써 현재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지난 1일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윤석열 유튜브 채널 동영상 갈무리)
지난 1일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윤석열 유튜브 채널 동영상 갈무리)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동과 윤석열 정부의 정책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치 구도가 강화됐다. 한편 국제사회에서는 미국 리더십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 등을 거치며 약화되고 있다. 만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사실상 러시아 승리로 휴전될 경우 미국 리더십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본격 다극(多極)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크다. 강대국들이 각 지역별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가운데, 각 민족국가는 각자도생하는 국제질서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 정부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평화, 번영을 위해 미·중 사이 균형 외교와 남북 공조가 절실한 객관적 조건을 도외시한 채 미·일 일변도의 편중 외교를 펼치고 있다. 게다가 미국처럼 초강대국이나 할 법한 자유·인권·법치 등 가치 외교를 전면에 내세우며 실용을 도외시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북·러 군사협력이 급진전된 상태에서 작년 연말 김정은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두 국가론’를 주창했다.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흡수통일·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올해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헌법 조문에 대한민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하고, “공화국의 민족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최고인민회의는 이 지침에 따라 “북남대화와 협상·협력을 위해 존재하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기구를 폐지한다”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이어 6.15 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민족화해협의회, 단군민족통일협의회도 폐지했고, 평양에 있는 김일성의 통일업적 상징물인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도 철거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에 대해 ‘반민족적’이라고 비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을 달래지도 않고, 중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북한의 움직임을 제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과 중·러를 자극하는 언행만 골라서 하고 있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손질해 흡수통일 인상을 더 짙게 하겠다고 한다. 또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내년에 한일 정상의 새로운 공동선언문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한일 협력을 “과거를 모두 넘어서는 미래지향” 속에서 사실상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윤 정부의 천방지축이 어디까지 갈지 알 수가 없다, 이러다 자칫 대한민국의 파경으로 치닫지 않을까 걱정이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저서 "통일코리아 가는길", "북핵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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