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두 국가론’을 주창했다. “흡수통일 ·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며,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미가 군사적 대결을 기도한다면 “우리의 핵 전쟁억제력은 주저없이 중대한 행동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위협했다. 위 발언의 의도는 무엇일까? 한·미에 대한 핵무기 위협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족’, ‘통일’마저 부정하는 것일까?

두 국가론의 파격성

먼저 김정은의 ‘두 국가론’이 북한 역사에서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그간 숱하게 겪었던 위기를 ‘애국주의’와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헤쳐 왔다. 1998년 김정일은 식량난으로 수많은 주민이 아사했던 ‘고난의 행군’ 와중에도 ‘전 민족의 대동단결을 통해 조국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조선 민족은 같은 피를 이어받았으며, 수천 년 동안 같은 땅에서 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해 온 동질적인 민족이다. 북과 남과 해외의 모든 조선인은 조선 민족의 피와 영혼을 지닌 같은 민족에 속하며, 같은 민족적 이익과 같은 역사적 심리와 감정으로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외세에 의해 갈라진 우리 민족의 재통일은 우리 민족사의 불가피한 추세이며 민족 발전의 법칙이다.”

이처럼 ‘민족’과 ‘통일’은 북한에서 체제와 수령 리더십의 정당성 확보, 인민 대중의 동원 및 일체감 조성, 경제적 궁핍을 견뎌내는 중요한 담론이었다. 북한은 1973년 간행한 "정치사전"을 통해 ‘민족’을 “언어 · 지역 · 경제생활 · 혈통과 문화 · 심리 등에서 공통성을 가진,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1964년 김일성의 “조선어를 발전시키기 위한 몇 가지 문제”라는 논문의 “언어는 민족을 특징짓는 공통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다. 핏줄이 같고 한 영토 안에서 살아도 언어가 다르면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조선 인민은 핏줄과 언어를 같이하는 하나의 민족이다”를 이어받은 것이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은 위와 같은 ‘김일성·김정일 주의’의 핵심 내용을 뒤엎은 이념적 반란이다. ‘두 국가론’은 한미에 대한 핵위협을 극대화하기 위한 카드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핵무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다시피 실전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지난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북한 평양 노동당 본부 청사에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 해 사업을 결산하고, 내년도 국정운영 목표를 밝히면서 대남정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지시했다.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TV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지난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북한 평양 노동당 본부 청사에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 해 사업을 결산하고, 내년도 국정운영 목표를 밝히면서 대남정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지시했다.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TV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체제 방어용 수세 담론

독일 분단사에서도 ‘두 국가론’이 존재했다. 1971년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호네커는 ‘2민족 2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동·서독은 그간 서로 이질적인 사회발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 완전히 다른 민족이 되어, 이제 동독에는 ‘사회주의적 민족’이 서독에는 ‘자본주의적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974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로 바꿔 ‘독일’이라는 표현을 아예 헌법에서 삭제해 버렸다. 이후 호네커는 서독과 관계 개선을 위한 수많은 조약과 협약을 맺으면서도 국제법상 별도의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호네커의 ‘두 국가론’은 체제 경쟁에서 서독에게 압도당한 동독의 처지에서 흡수 통일당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북한의 대남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1990년대 부터다. 1980년대 후반 소련 해체로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 곤경에 처하며 대남 전략이 공세에서 수세로 바뀐 것이다. 김일성은 1991년 신년사에서 1980년 제6차 노동당 당대회에서 채택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내용을 수정할 의사를 내비쳤다. 잠정적·단계적 연방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간 절대불가 영역이었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수용했으며, 통일보다 북한체제의 방어를 향해 움직였다. 1991년 12월에는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남한 정부와 ‘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시켰다. 북한은 이 합의를 통해 남한 정부의 실체를 공식 인정하는 대가로 북한체제의 안정을 위한 대외적 환경 개선의 성과를 얻었다. 그리고 그간 공식적 대남 전략이었던 ‘남조선 혁명론’을 형해화시켰다. 2000년대 초반 북한 지도부는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남북 간 교류·협력 증가로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되었다. 경제난 타개에 필요한 개혁·개방의 속도와 폭을 조절하는 것도 문제지만, 남북 관계 호전과 북한체제 유지는 근본적으로 상충되기 때문이었다. 남북 관계의 지나친 호전은 외부의 적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내부 문제를 두드러지게 해 체제유지를 위협했던 것이다.

김정은은 현실주의자다. 바뀐 상황에 맞게 핵심 이데올로기도 과감히 바꾸는 스타일이다. 2021년 노동당 당대회에서 당 규약의 핵심 내용을 뜯어고쳤다. 서문에서 노동당의 당면 목적을 기존의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 과업 수행”을 삭제하고, 대신 “공화국 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발전 시현”을 삽입했다. 4조 당원의 의무에서는 기존의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국력에서 남한보다 크게 열세인 북한 입장에서 허울뿐인 통일 공세를 취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다고 본 것이다.

한국 사회의 대응

한국 사회는 두 국가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남북 관계가 이제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두 국가'로 간다고 호들갑을 떨어야 할까?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두 국가론’에 대한 서독의 대응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서독은 동독의 태도가 국력 열세인 처지에서 체제 유지를 위한 몸부림이라는 인식하에 꾸준히 동독과 교류·협력을 추진하였다. 1972년 ‘동서독 관계에 대한 기본조약’을 타결시키고 이후 30여 개 협약을 체결했으며, 수많은 민간 교류와 경제 협력을 추진했다. 서독은 경제가 어려운 동독을 지원하며 상호주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현금으로 주다가 나중에 어느 정도 정례화가 되고 또 동독이 지원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현물 지원으로 돌아서며 방송개방과 같은 조건을 걸었다. 사민당의 동방정책이 1969년부터 10년 넘게 지속되며 지렛대(leverage)가 생겼고, 그걸 1982년 집권한 기민당이 이어받아 동독을 관리하며 1990년 통일로 나아갔던 것이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저서 "통일코리아 가는길", "북핵해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