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가 수난을 겪고 있다. 탈(脫)민족론이 남북에서 공히 기승을 부리며 민족주의가 시대에 뒤진 낡은 퇴물로 취급되고 있다.

남북에서의 탈민족론

북한에서는 김정은 총비서가 작년 연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두 국가론’을 주창했다.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흡수통일 ·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헌법 조문에 대한민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하고, “공화국의 민족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최고인민회의는 이 지침에 따라 “북남대화와 협상·협력을 위해 존재하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기구를 폐지한다”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이어 6.15 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민족화해협의회, 단군민족통일협의회 등도 폐지했고, 평양에 있는 김일성의 통일업적 상징물인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도 철거했다.

민족주의 폄하는 윤석열 정부 또한 뒤지지 않는다. 윤 정부의 외교·안보 요직을 꿰차고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뉴라이트 인사들은 한결같이 민족과 민족주의를 부정한다. “민족주의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고, “민족주의로는 선진화로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해체하고 분별력 있는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 개체를 역사 서술의 단위로 삼는” 자유주의가 민족주의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뉴라이트 이론가 이영훈은 “민족이란 20세기에 들어 구래의 조선인이 일제의 식민지 억압을 받으면서 발견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라며, 근대 이전 신분 차별이 존재했던 곳에서는 민족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민족 통일에 대해서도 “통일은 우리의 지상과제라고 할 수 없다”며 “선진화로 가는 여러 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에, 남한식 자본주의하의 흡수통일이 아닌 한 통일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한 뉴라이트는 대안교과서 집필과 보급을 통해 근현대사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갑오농민운동 – 3.1운동 – 임시정부와 항일무장투쟁 – 4.19 혁명 – 5.18 민주화운동 – 6.10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저항적 민족주의를 폐기하고, 식민지 근대화론 – 이승만 나라세우기론 – 박정희 근대화혁명론 등 탈민족 근대화론으로 근현대사 재해석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기존의 반민족 친일·독재 세력을 건국·근대화 세력으로 탈바꿈시켜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려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탈민족론의 등장 배경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일제 강점기 시기 민족해방운동과 분단 이후 통일운동 ·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이념적 토대로서 20세기 전 기간에 걸쳐 한국인의 의식과 감성의 원천이었던 민족주의가 요즘 왜 이리 핍박을 당하는 걸까? 남과 북, 남쪽의 보수·진보의 사정이 각각 다르다. 먼저 북쪽을 보면 2000년대 이후 개방과 남북 간 교류·협력이 진행되며, 민족주의가 더 이상 북한 사회에서 체제의 정통성 확보와 국민 통합 · 고난 극복의 순기능보다는 체제 이완의 역기능으로 작용한다고 여겨지는 듯 싶다.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는 남북관계 호전과 남북 간 교류·협력 확대 상황에서 민족주의 담론은 국력 열세에 있는 북한체제 유지에 원심력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과 민족담론 폐기 선언은 남북 간 적대 심화, 한미일 대 북중러 진영대결 격화 속에서 선택한 전략적 모험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북한 내부적으로 상당한 혼란과 진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북한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인 ‘김일성·김정일 주의’가 다름 아닌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주체 사상의 핵심인 ‘인민대중에 의거하는 방법’과 ‘실정에 맞게 하는 방법’은 바로 ‘민족에 의거하는 방법’과 ‘우리식 방법’일 만큼 주체사상과 민족주의는 밀접하다.

남쪽에서 일고 있는 탈민족론은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 세계화 물결과 연관되어 있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로 냉전체제가 붕괴되며 세계질서는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로 변모하였다. 이로 인해 시장이 전 세계로 확대되고 나라 사이 교류·협력이 급증하며 글로벌리즘 ·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떨치게 된다. 민족주의는 서구 중심의 국제사회에서 터부시되었으며, 우리 사회에서도 학계와 시민운동 중심으로 탈민족론이 대두되었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뉴라이트의 공세적 탈민족·선진화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보수 진영에게 가뭄에 만난 단비였다.

민족주의의 진면목

민족주의를 폐기해야 하는 걸까?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이어서 파시즘 · 전체주의의 자양분이 되는 민족주의는 이제 척결 대상이 되는 걸까? 칼이 살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에 칼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없다.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살리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또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의 폐해가 크기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1인1표로 상징되는 민주주의는 신정국가를 제외한 대다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치 이념으로서, 결점을 보완해 끊임없이 자신의 실정에 맞게 발전시켜야 할 이데올로기다.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다. 장점을 살려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민족은 겔너(Ernest Gellner), 홉스봄(Eric Hobsbawm), 앤더슨(B. Anderson) 등의 주장과 달리 원형이 씨족과 종족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코 근대의 산물이 아니다. 오랜 역사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역사적 실체다. 더욱이 유럽과 달리 오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동아시아에서 그 뿌리는 더 깊다. 또한 민족구성원 개개인의 삶에 체화된 의식구조이자 구체적 생활 모습인 민족주의는 연대의식 · 수호의지 · 발전지향이라는 근본 속성으로 인해 빼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참된 민족주의는 민족의 발전을 지향하기에 폐쇄와 배타가 아닌 개방과 수용을 추구하며 타자와 공생공영을 도모한다.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추구하고, 남보다 더 진보를 염원하는 발전 지향성 속에서 민족주의는 배타로 흐를 수 없다. 4년마다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는 월드컵 응원 열기는 인류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는 애족심의 분출로서 선의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민족주의의 분출이다. 월드컵 경기를 통해 전 세계는 하나가 된다. 이처럼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상충되지 않는다. 민족주의는 국제 협조와 연대에 더 적극적이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국제주의자이고, 참된 국제주의자는 민족주의자다. 국제화 시대에 일국의 민족 문제 속에는 국제성이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문제 해결의 주체는 당사자 자신이다. 국제 협조나 연대도 주체가 주체다울 때 성사될 수 있다.

둘째, 민족주의는 대중 정서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 호소력이 큰 이념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주의는 최강의 이데올로기로서 한반도를 통틀어 유일한 정치이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 위력은 탈민족론자의 주장 속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뉴라이트 이론가 이영훈은 민족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이유가 “아직 어떤 이념도 예컨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민족주의의 위력이 너무 거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정통성이 결여된 집단일수록 민족주의를 차용해 자신을 미화시켰다. 해방 직후 탁치정국에서 반탁 진영이 자신을 민족주의자, 상대방을 모스크바 지시를 따르는 사대공산주의자로 프레임을 설정했던 사례, 5.16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이 결여됐던 박정희 정권이 조국근대화를 내세우며 민족주의를 활용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진보를 위한 사회운동도 민족주의와 결합할 때 승리를 기약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민족주의는 대내적으로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낳고 대외적으로 배타주의와 침략주의를 야기하는 위험한 사상이라는 편견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제 남북의 지배세력도 탈민족론을 옹호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을 위해서 통일은 포기할 수 없는 염원이다. 남북은 같은 민족이기에 통일의 당위성이 생기는 건데, 도대체 민족과 민족주의를 포기하고 어찌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모두 아무리 힘들어도 민족을 포기해선 안 된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저서 "통일코리아 가는길", "북핵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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