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로마나 대 팍스 크리스티

평화 방정식? 글을 쓰고 나서 마땅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끙끙대고 있을 때 갑자기 떠 오른 단어다. 평화는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과 국제관계학의 대표적 가치이자 개념이다. 방정식은 수학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수많은 ‘수포자’를 만든 제1원인이었다. '평화 방정식'은 어울리지 않은 두 이질적인 개념의 물리적 또는 화학적 결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방정식은 언뜻 다양하고 개별적이고 제각기 달라 보이는 현상들에 보편적이고 통일된 법칙이 성립함을 식으로 보여 준다는 특징이 있다. 즉 복잡한 사회 현상을 보편적인 수학적 규칙으로 설명하는 것이며, 이질성과 다양성 안에 담긴 통일성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수학에서 방정식(方程式, equation)은 미지수가 포함된 식에서 그 미지수에 특정한 값을 주었을 때만 성립하는 등식이다. 미지수를 보통 X, Y로 표시하고, 미지수의 개수와 차수에 따라 0원0차 방정식이라고 표현한다. 사회의 내부 구조와 외부 환경이 복잡할수록 포함 숫자가 늘어난다.

방정식이란 표현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많은 학자가 한반도의 분단, 전쟁과  평화 문제를 사회과학적 분석 틀을 이용해 설명해 왔다. 크게 이념적으로 현실주의, 이상주의와 구성주의 그리고 내인론과 외인론 등 다양한 분석 틀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원인과 결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 등을 설명했다. 최근에는 분단, 민주화, 인권, 개발과 환경, 안보와 평화 등 다양한 변수를 연계하고 통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역사적으로 분단 피해자였다. 북한에 있던 수도원과 교회 재산 몰수 그리고 순교자 수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지원했던 대다수 국가는 그리스도교 국가였다. 전쟁 후 한국 가톨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 이 국가들의 지원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교회는 50년대 이후 냉전과 군사 독재 시절 반공 이념의 보루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와 통일 운동이 부각되면서 민족 화해 중요성이 떠올랐다.

이러한 역사 경험을 한 한국 가톨릭교회가 21세기가 20여 년이 지난 현재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입장과 계획은 무엇인가? 있다면 어떤 방정식으로 표현이 가능할까? 과거 특정 사안에 대한 주교회의 의장 또는 관련 위원회는 성명서를 종종 발표했다. 그러나 필자가 무지해서일 수도 있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이에 대한 공식 문헌을 찾지 못했다.

물론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미 다양한 제도와 사업을 통해 평화 관련 활동을 해 왔다. 이 과정에서 평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졌다. 다만 이를 연계하고 통합하여 공식 문서로 만드는 작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에 반해 보편 교회를 대변하는 바티칸은 평화와 평화 관련한 다양한 쟁점에 대해 정기적으로 교황 회칙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정리해 왔다. 국내에서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지침(가르침)인 사회교리에는 2000년 걸쳐 제도로써 생존해 온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지혜가 담겨 있다. 평화를 위한 집단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다양한 제도와 단체가 출범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평화 단체

현재 가톨릭교회 안에 평화가 명시적으로 포함된 단체가 3개다. 주교회의 산하의 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대학생운동 연합회의 명칭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 그리고 국제 가톨릭평화운동 단체인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International)다. 그리고 평화 이름의 연례 행사 하나로는 매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교황의 담화문이 있다. 

세 단체는 다른 역사 배경에서 시작했고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발전해 왔다. 팍스 로마나는 가톨릭 대학생 또는 졸업생 즉 평신도 단체라면, 정의평화위원회는 주교회의 산하 공식 위원회이며, 팍스 크리스티는 가톨릭평화운동 단체다.

흥미롭게도 세 단체의 이름에는 오늘날 평화를 보는 세 가지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먼저 정의평화위원회의 명칭인 정의평화는 평화학에서 “적극적 평화 Positive Peace”로 설명한다. 그리고 팍스 로마나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소극적 평화 Negative Peace”  또는 “힘에 의한 평화”를 의미한다. 성서에 말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 크리스티는 다차원적 통합적 평화라고 할 수 있다. 통합의 의미는 다차원이 단순히 기계적 나열이 아니라 내면과 외면이 연결되어 있고 평화를 목적이자 수단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평화학에서는 이를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또는 “비폭력 평화”라고 한다. 또는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라고도 할 수 있다. 팍스 로마나가 국제정치학 이론에서 현실주의 입장을 반영한다면 팍스 크리스티는 이상주의를 반영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정의평화위원회 이외에 평화 관련 위원회가 두 개 더 있다. 1982년 설립한 민족화해위원회와 2016년 설립한 생태환경위원회다. 민족화해위원회는 한반도 평화의 가장 큰 구조적 원인이자 위협인 민족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화해를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 생태환경위원회는 사회경제적 정의를 넘어 생태정의와 기후위기 극복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태정의는 민족과 한반도를 넘어 문명적 차원, 즉 자연 자원에 대한 무한 착취와 탄소배출을 통해 산업화를 달성한 북반구 그리스도교 서구 문명과 이 과정에서 착취당하고 구조적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남반구 사이의 정의 문제를 다룬다.

(위) 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로고와 팍스 크리스티 한국 로고. (출처 = 각 단체 페이스북) (아래) 팍스 로마나 로고. (출처 = en.wikipedia.org) 
(위) 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로고와 팍스 크리스티 한국 로고. (출처 = 각 단체 페이스북) (아래) 팍스 로마나 로고. (출처 = en.wikipedia.org) 

정의평화위원회 – 팍스 로마나 – 팍스 크리스티  

역사적으로 팍스 로마나는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1년에, 팍스 크리스티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에 둘 다 유럽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정의평화위원회는 냉전 시기인 1967년 교황청 산하 단체로 출범하여 지역 교회, 특히 중남미,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급속히 확산했다. 평화라는 공통 이름이 상징하듯이 모두 전쟁과 연계되어 있다.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은 정의평화위원회 설립 다음 해인 1968년부터 해마다 발표하고 있다.1)

이 세 단체가 한국에 도입 또는 탄생한 시기로는, 팍스 로마나는 1950년대, 정의평화위원회는 1970년 초, 팍스 크리스티는 2019년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팍스 로마나와 정의평화위원회는 유럽에서 시작한 직후 국내 도입 또는 국내 단체가 연계한 반면,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는 거의 70년이 지난 최근에 출범했다는 점이다. 마치 초대 한국 교회가 선교사 없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공부하고 스스로 교회를 만들었던 경험과 유사하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는 2019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반도 평화 프로세스’ 보편 교회와 조직적으로 연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발적으로 시작했다.2)

팍스 로마나와 팍스 크리스티 모두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 등 그리스도교 국가끼리 전쟁을 두 번 치룬 유럽에서 화해를 주된 동기로 시작했다. 이후 1960년대 남미,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개도국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탈식민지와 냉전 상황에서 등장한 군사독재에서 일어난 대규모 인권침해에 적극 대응하면서 정의 문제가 크게 부각했다. 자연스럽게 정의와 평화는 이 단체의 정세성을 규정하는 가치로 자리잡았다.

한국은 유럽과 다른 개도국 일반과 궤적을 같이하면서도 냉전의 산물인 민족 분단으로 인해 매우 다른 경로를 보여 왔다. 즉 정의와 평화가 활동의 두 축이었지만 정의평화위원회는 민주화 과정에서 평화보다는 인권 등 정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고, 민족화해위원회는 민족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화해와 통일 운동 쟁점을 주로 다루었다. 둘 다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평화를 목적으로 하지만 평화를 이루는 방식 또는 접근 방식에서 차별이 드러난다.

팍스 로마나의 이중적 의미

팍스 로마나는 교황 비오 11세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2년 팍스 로마나 대학생 대표단을 만났을 때 부여한 단체 명칭이다. 로마 제국은 문명의 상징으로 평화로운 질서가 있고, 교황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 국가끼리 대규모 살상이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폭력과 야만의 세상이었다. 실망과 좌절의 시기에 서로 총을 들고 싸웠던 국가의 가톨릭 대학생을 만난 교황에게 이들은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에게 야만이 아닌 가톨릭 신앙에 따른 미래 사회를 꿈꾸었고 이를 팍스 로마나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는 국제정치학에서 로마제국 치하의 질서를 의미한다. 즉 강력한 힘의 지배 질서 안에 있을 때 외부 침략을 피할 수 있다는 힘에 의한 평화 논리를 말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가톨릭대학생운동인 팍스 로마나는 역설적으로 이름과 내용이 ‘명실상충’하는 딜레마를 겪게 되었다.

팍스 로마나의 현실주의 접근은 이후 제국주의적 질서의 대명사가 되어 팍스 브리타니카, 팍스 아메리카나, 팍스 시니카(중국)로 이어졌다. 이른바 지정학적 패권과 질서다. 이 모든 명칭은 1극 체제, 즉 한 초강대국에 의한 질서를 의미한다. 중국과 유럽의 현실 역사는 초강대국이 없는 때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전쟁이 악순환이었다. 194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국제 질서는, 유럽에서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승자인 미국이 지배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다. 외형적으로는 팍스 유엔이었지만 미국이 국제 질서의 경찰 또는 담보자 역할을 해 왔다.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이 최근 일어난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패권에 대한 도전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사회 회칙과 21세기 평화 방정식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23세가 1963년 발표한 '지상의 평화'의 맥을 이어서 취임한 2013년부터 세 회칙을 통해 평화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길을 순차적으로 제시해 왔다.3) 2013년 '복음의 기쁨'으로 평화의 영성을, 2015년 '찬미받으소서'로 생태평화를, 그리고 2020년 '모든 형제들'로 정의평화의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새해 첫날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교회 회칙은 21세기 가톨릭교회의 평화 방정식의 주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A+B+C) x Y 방정식 형식으로 아래에 표현할 수 있다.  

(지상의 평화 + 찬미받으소서 + 모든 형제들) x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왼쪽부터) '지상의 평화' 인터넷 문서, '찬미받으소서', '모든 형제들' 표지. (이미지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왼쪽부터) '지상의 평화' 인터넷 문서, '찬미받으소서', '모든 형제들' 표지. (이미지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이 방정식에는 적극적 평화와 정의로운 평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한반도와 동북아 상황에서 맥락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미래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분단된 한반도에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구 냉전’의 산물인 민족 분단과 ‘신냉전’의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지정학적 충돌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방정식은 3원2차 방정식으로 민족 분단과 지정학적 갈등의 두 차원이 포함되어야 한다.

(지상의 평화 + 찬미받으소서 + 모든 형제들)² x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2022년 2월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과 2023년 10월 발발한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힘에 의한 평화라는 현실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건강 악화에도 다각도로 평화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와 한반도 평화 방정식

이런 와중에 한반도에서 핵무기 위협과 군사적 충돌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많은 신자가 저녁 매일 9시에 주모경과 민족화해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파티마의 성모님께 전구하지만 주변은 아직 깜깜하기만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지난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 중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사람은 78명으로 약 25퍼센트에 해당한다. 인구 통계를 따르면 약 11퍼센트가 천주교 신자다. 국회의원 비율은 일반 신자에 비해 2배를 훨씬 상회한다. 그러나 올해 선거에 출마하는 천주교 신자 후보자 중 과연 몇 명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라 한반도 평화를 정책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21세기 그리스도의 평화는 ‘팍스 로마나’를 넘어 정의에 기반하고, 화해를 수반하며, 생태적이며 평화적 수단을 통한 평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평화는 과연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할까? 이러한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이런 취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1월 1일 '좋은 정치는 평화에 봉사합니다'라는 제목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제 국회의원 선거가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에 참여하는 가톨릭 신자 후보자는 자신이 속한 정당과 자신의 지역구 공약을 이 한반도 평화 방정식에 비추어 다시 한번 검토해 보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유권자도 담화문을 다시 읽고 좋은 정치인에게 투표하기를 바라본다. 

1) '인공지능과 평화 – 두 세계평화의 날', 이성훈,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4년 1월
2)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 왜 지금 여기', 이성훈,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9년 7월
3) '지상의 평화 60주년 – 나카사키 단상', 이성훈,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3년 12월 

이성훈(안셀모)

아시아시민사회지속가능발전목표(SDGs) 파트너십 대표
팍스크리스티코리아(PCK) 창립 공동대표, 현 국제협력 이사
대학 가톨릭학생회 활동 경험을 계기로 홍콩, 제네바, 방콕 국제 가톨릭 및 인권NGO에서 15년 근무하는 등, 약 30년간 인권과 민주주의, 지속가능발전과 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했다. 최근에는 천주교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으로 평화와 기후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지식으로 나누기 위해 경희대, 아주대, 성공회대 대학원에서 강의도 병행해 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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