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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왜 지금 여기[신학과 성찰 - 이성훈]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7-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국제 평화운동 단체인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가 곧 한국에서 닻을 올릴 예정이다. 팍스 크리스티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한 요한복음 14장 27절의 ‘그리스도의 평화’를 의미한다. 로마제국 지배하의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대비가 되는 개념이다.1)

팍스 크리스티 운동의 역사

아직 국내에 생소한 팍스 크리스티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3월 13일 프랑스에서 시작했다. 당시는 이미 독일군의 패배와 후퇴로 프랑스 영토 대부분이 연합군에 의해 회복되었고, 독일의 항복을 눈앞에 둔 시기였다.

프랑스의 국립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을 가르치던 평신도 교사 마르테 도르텔 클로도(Marthe Dortel-Claudot)는 프랑스 남부지역 몽토방교구의 피에르 마리 테아(Pierre Marie Théas) 주교를 처음으로 면담했다. 그녀는 주교에게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와 독일 국민의 반목과 증오를 극복하고 서로의 회개와 화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운동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구했다. 후에 그녀는 일지에 “그날의 만남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성령의 이끌림에 따른 것이었다”라고 적었다. 팍스 크리스티는 이 만남이 이뤄진 3월 13일을 창립 기념일로 정했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던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으로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를 잘 알았던 그녀는 전쟁 이후 가톨릭 신자로서 화해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테아 주교 또한 전쟁 중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나치 치하에서 감옥생활을 했기에 그녀의 비전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팍스 크리스티는 비슷한 경험과 같은 비전을 지닌 두 사람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테아 주교는 초대 회장, 클로도는 사무총장으로 초창기 팍스 크리스티 운동을 이끌었다.

이 운동은 곧 프랑스 전역과 국경 너머로 확산되었고, 독일과 다른 나라 가톨릭교회의 호응을 얻었다. 독일에서도 팍스 크리스티 단체가 만들어져서 프랑스와 독일 가톨릭교회, 특히 청년들의 적극적인 교류가 있었다. 1950년에 파리대교구 교구장이던 모리스 펠틴(Maurice Feltin) 추기경이 팍스 크리스티 국제운동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팍스 크리스티는 사무국을 파리로 옮기면서 더욱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 당시 ‘기도-공부-실천(Prayer-Study-Action)’이라는 실천방법을 정식화하면서, 팍스 크리스티는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평화운동으로 성장했다. 그 결과 1952년 교황 비오 12세는 로마를 방문한 팍스 크리스티 대표단 면담을 계기로 공식적인 가톨릭 국제 평화운동의 지위를 부여했다. 팍스 크리스티는 1963년 선포된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회칙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 문서를 팍스 크리스티의 공식적인 헌장으로 채택했다.

팍스 크리스티는 1945년 프랑스의 한 평신도와 주교의 영적 만남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의 사회 및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는 평화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대 이후 동서 냉전 시대에는 핵무기 반대와 군축뿐 아니라, 제3세계의 빈곤과 독재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남미에서 브라질의 헬더 카마라(Hélder Câmara) 주교와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대주교 등이 팍스 크리스티와 긴밀히 협력했다. 팍스 크리스티가 제3세계에서 전개한 정의와 인권 증진 활동은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정의평화위원회를 출범하고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회칙을 발간하는 데도 기여했다.

1990년 탈냉전 시대 이후 팍스 크리스티는 빈곤과 불평등, 민족 분쟁, 인종주의, 난민 문제 등에 집중했다. 그리고 뉴욕과 제네바, 브뤼셀 등에서 유엔과 유럽연합 등 국제기구 대상 옹호 활동과 종교간 대화와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팍스 크리스티는 2016년 10월 로마에서 지난 수십 년의 활동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정의로운 전쟁(Just War)’ 교리를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로 대치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회의를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와 공동으로 개최했다.2) 이 회의에서 팍스 크리스티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새 회칙 발간을 촉구한 바 있다.

오늘날 팍스 크리스티는 5개 대륙 50여 국가에서 120여 개의 단체 회원 약 50만 명이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우 12개국에서 활동하는데, 이중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만이 정식으로 팍스 크리스티 명칭으로 활동하고 다른 나라는 정의평화위원회 등 기존의 단체가 협력 관계를 통해 활동에 참여한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별 회원 단체 외에도 수도회 차원에서 국제회원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팍스 크리스티 국제 사무국은 벨기에 브뤼셀에 있고, 벨기에 출신의 여성 평신도 그리트 바네르샤트(Greet Vanaerschot)가 사무총장을, 미국의 여성 평신도 마리 데니스(Marie Dennis)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빈 다울링(Kevin Dowling) 주교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3) 여성 평신도가 시작한 팍스 크리스티의 전통이 오늘날에도 여성 리더십을 통해 이어진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소개지. (이미지 제공 =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팍스 크리스티 운동의 특성

팍스 크리스티는 역사적으로 시대의 징표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팍스 크리스티는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국제 가톨릭 평화운동’이라는 위상과 복합적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첫째, ‘그리스도의 평화’를 의미하는 단체 이름이 보여 주듯이, 세속 권력이 아닌 하느님나라의 평화라는 ‘가톨릭 평화관’에 근거해서 활동을 전개해 왔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거나 기계적인 세력 균형의 결과가 아니라, 깊은 영적 회개를 통한 이웃과의 화해와 사회적 정의를 추구할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팍스 크리스티는 이러한 평화가 가능하며 폭력과 불의의 악순환이 종식할 수 있다고 믿으며, 모든 공포와 폭력에서 자유로운 평화로운 세계 건설이라는 비전을 추구한다.

이러한 평화는 현대 평화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강조한 적극적 평화를 뜻한다. 적극적 평화는 전쟁과 무력 갈등의 부재를 넘어서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에 따라 팍스 크리스티는 전통적인 군축과 전쟁 반대뿐만 아니라 인권침해, 빈곤, 불평등, 불공정한 국제경제체제 및 최근에는 기후 및 환경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쟁의 원인을 다룬다.

둘째, ‘가톨릭 운동’으로서 팍스 크리스티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이자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이해한다. 즉 팍스 크리스티는 정의평화위원회나 카리타스 같은 주교회의 산하 단체가 아니다. 직능별로 구성되어 담당 ‘지도신부’가 있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도 아니다. 팍스 크리스티에는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평등하게 회원으로 참여한다. 12명으로 구성된 국제 이사회는 평신도, 수도자, 주교 포함 성직자로 구성되어 있다. 즉 엄격한 수직적 위계질서가 아니라 하느님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수평적인 파트너십을 강조한다.

팍스 크리스티는 가톨릭 사회운동의 ‘관찰-판단-실천'(See-Judge-Act) 원칙에 따라 “기도, 공부, 실천”을 방법적 원리로 삼는다. 이에 따라 “갈등 전환, 평화 구축, 평화 교육과 청년 활동 지원, 비폭력적 방법을 통한 사회변화 추구, 각 나라의 사회정치적 맥락에 맞는 옹호 활동 참여, 회원 단체의 역량 강화를 위한 교류와 연대” 등을 주된 활동 방향으로 둔다.

팍스 크리스티는 최근 가톨릭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에큐메니즘 즉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종교간 평화가 없으면, 세계 평화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올해 초 뉴질랜드와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대규모 테러사건은 종교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팍스 크리스티는 종교가 분쟁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해결의 주체라는 양면성을 깊이 이해한다. 특히 반유대주의와 이슬람혐오 등 모든 형태의 종교차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민의 화해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에큐메니컬 차원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타 종교의 평화운동 단체와 연대하고 있다.

셋째, ‘평화운동’으로서 팍스 크리스티는 아래로부터 참여를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국제 평화 캠페인을 전개한다. 팍스 크리스티 회원 단체는 국제본부의 결정을 시행하는 하부조직이 아니다. 팍스 크리스티 회원은 각자가 처한 상황을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실천하면서 국제적 연대활동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교황청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부와 유엔 등 국제기구와도 긴밀히 협력한다.

왜 지금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인가?

팍스 크리스티 홈페이지에는 한국의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단체가 등록되어 있지만, 가톨릭 평화운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정식 출범 예정인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Pax Christi Korea, PCK)는 ‘가톨릭교회 평화운동’으로서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국제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올해 1월 1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좋은 정치는 평화에 봉사합니다’라는 주제의 세계평화의 날 담화문을 발표했다. 올해 1월 초 PCK 준비모임 참석자는 이 담화문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관련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교회와 사회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초 평창 올림픽 1주년 기념 평창평화포럼에서 평화와 종교간 대화 세션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후 월례 발기인 모임을 통해 팍스 크리스티의 역사와 가톨릭 평화운동의 정체성 및 한국에서 역할 등을 공부해 왔다. 그리고 최근 창립총회를 위한 정관 준비와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 있다.

공식 명칭에 한국 대신 코리아를 명칭에 쓰는 이유는 강요된 분단 하에서 ‘거짓 평화’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참 평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은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한반도 ‘이남’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코리아’는 분단 이전의 과거 한반도와 통일 이후 미래의 한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PCK 출범은 한반도 비핵화와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 구축이라는 21세기 국운이 걸린 역사적 과제를 앞두고 현시점에서 매우 시기적절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다. 최근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국내 및 국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계 교회와 시민사회와 좀 더 넓게 연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PCK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유럽 및 아세안 국가의 가톨릭교회와 협력해 한반도 분단 극복과 평화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공공외교관’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지금까지 한국 가톨릭교회의 정의평화운동은 ‘정의’와 ‘화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남북 분단과 군사 독재에서 비롯된 다양한 인권 침해 문제, 전쟁과 집단 학살의 비극적 경험을 겪은 민족의 화해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러한 문제의 구조적, 국제적 원인인 비핵화를 포함하여 보편적 군축, 군사주의 반대 등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았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를 통해 ‘평화’의 축이 세워진다면, ‘정의-화해-평화’의 균형 잡힌 가톨릭 사회운동의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국제 팍스 크리스티는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에서 시작해 국제사회의 정의와 평화로 확대되었다. PCK도 남북의 화해에서 시작해 국제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바란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소개지. (이미지 제공 =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2020년, 카이로스와 주빌리

2019년과 2020년은 한반도의 100년 국운을 좌우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구축의 역사적 과제를 풀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특히 2020년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을 맞는 해다. 성경에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15)라고 말하는 카이로스(Kairos)의 때다.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시간이지만 인간 역사에서는 기회이기도 하다. 국제 시민사회와 개신교에서는 이미 한반도 평화조약 제정을 위한 ‘Peace Treaty(평화협정) 2020’ 국제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4) 또 최근에는 2020년을 핵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희년(Jubilee) 2020 국제 서명 캠페인을 논의하고 있다. 한반도생명평화국제연대는 “70 Years is Enough.”(70년이면 충분하다)라는 구호를 2만 5500명(70년×365일)이 몸을 연결해서 형상화하는 기네스북 도전 행사를 준비한다.5)

우연의 일치인지 역사적으로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트고 평화 정착 이끌어 온 김대중(토마스 모어), 노무현(유스토) 역대 대통령이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현재 문재인(디모테오) 대통령이 그 역할을 이어서 수행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북한 방문을 기꺼이 수락했다. 교황은 북한의 공식 초청장을 기다리는 한편, 올해 11월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본 방문 때 전쟁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통한 화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비핵화와 평화 구축을 촉구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출범하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시대의 징표’를 잘 분별해서, 하느님의 섭리를 충실히 실현하는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기대한다.

1) 팍스 로마나는 국제 가톨릭대학생 운동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2) 조효제, '‘정당한 전쟁’ 대신 ‘정당한 평화’를', <가톨릭 평론> 4호(2016년 7-8월호), 118-125쪽 참조; 함패트릭, '로마회의: 비폭력과 정의로운 평화', <가톨릭일꾼> 2016.10.4. 칼럼 참조.

3) 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국제사무국 공식 홈페이지(https://www.paxchristi.net)

4) 국제여성평화걷기(https://www.womencrossdmz.org)

5) 한반도생평명화국제연대(www.peace4korea.org)

이성훈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 특임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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