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교황청은 2024년 세계 평화의 날 주제가 '인공지능과 평화'라는 것을 공지했다. 그리고 수개월 동안 다양한 관련 분야 단체와 전문가와 의견을 참고하고 수렴한 담화문을 12월 중순에 공개했다. 이에 올해 1월 1일 새해 미사 주보에는 담화문이, 국내 가톨릭교회 신문은 관례대로 1면에 담화문 요약 및 해설 기사를 실었다. 

가톨릭의 이러한 전통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냉전 시기 변화하는 지정학적 세계 질서 상황에서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1967년에 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1월 1일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하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후 세계 평화의 날은 정의평화위원회의 연례 행사이자 주요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국제 사회 특히 가톨릭 국가에서는 교회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서도 교황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새해 화두로 크게 다룬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가톨릭교회 언론에서만 다루고 일반 언론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명칭은 ‘세계 평화’이지만 현실에서는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평화’다. 국내에는 팍스크리스티코리아(PCK)가 2020년부터 교황의 평화 담화문이 가톨릭교회 전체 그리고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으로 담화문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세미나를 연례 행사로 조직해 왔다. 이는 전 세계 대다수 팍스크리스티 단체가 조직하는 새해 첫 행사이기도 하다. 

인터넷에 세계 평화의 날을 검색어로 치면 유엔 세계 평화의 날이 뜬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이 유엔과 가톨릭교회의 세계 평화의 날을 혼동하곤 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세계 평화의 날은 가톨릭의 새해 첫날 1월 1일과 유엔의 추석 즈음인 9월 21일 두 개다. 가톨릭교회의 세계 평화의 날은 영어로 'World Day of Peace'이고, 유엔은 'International Day of Peace'다. 후자를 국제 평화의 날이라 직역할 수 있지만 세계 평화의 날이라 번역해 왔다.

한편 민간의 대표적인 평화 기념 행사인 노벨평화상은 10월 첫 주에 발표한다. 현재 가톨릭교회, 유엔 그리고 노벨평화상이 국제적인 대표적 연례 평화 기념 행사이며, 가장 주목받는 것이 노벨평화상이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에 수상했다. 한국과 국제 사회의 주요 언론은 수상자가 발표되기 전 후보자 예측 보도부터 발표 후 수상 배경과 의미에 대한 기사를 한동안 쏟아낸다. 가톨릭교회와 유엔 평화의 날과 매우 대조적이다.

9월 21일, 유엔 세계 평화의 날

‘세속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엔 사무총장은 해마다 6월 13일에 세계 평화의 날 주제 메시지를 발표한다. 이날부터 9월 21일까지 100일간 국제 사회가 그해의 평화 주제에 따라 함께 노력하자는 취지다. 이 전통은 가톨릭교회보다 늦게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아마도 유엔이 뒤늦게 가톨릭교회를 벤치마킹한 듯하다. 

이 세계 평화의 날은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유엔이 총회에서 이날을 제정했던 1981년 총회에 결의안 제출을 주도했던 나라는 영국과 코스타리카였다. 그해 한국은 ‘서울의 봄’이 좌절되고 광주에서 전두환 군부에 의한 대량살상이 일어난 해였다. 국제적으로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기 군사력 경쟁이 최고조에 달해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희대학교 설립자 고 조영식 박사는 세계대학총장회의를 조직하고 이를 이용하여 코스타리카 정부를 설득해 이 결의안 제출을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은 유엔에 가입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과 북한은 미소 냉전 구도가 와해된 199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즉 오늘날 ‘공공 외교’ 또는 ‘국민 외교’란 개념으로 정립된 실천을 나 홀로 한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경희대는 지금도 유엔 세계 평화의 날을 한 주간 다양한 국내 및 국제 행사로 기념하고 있다. 

이 유엔 세계 평화의 날 제정은 나비효과를 일으켜 1980년대 초 동서 냉전으로 갇혀 있던 평화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했다. 1986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서로 협력해서 핵전쟁을 방지하고 화해의 새 시대를 여는 데 함께 노력하자"는 메시지를 공표하는 전환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유엔은 1886년을 세계 평화의 해로 선포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동서냉전의 상징인 분단 국가 한국에서 1988년 올림픽이 열렸다. 그리고 소련의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은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81년 유엔 평화의 날 제정 결의안은 9월 셋째 주 화요일로 선포했지만 2001년부터 9월 21일로 기념하고 있다. 결의안은 21일 하루 24시간 동안 폭력과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전통에 이어 1993년부터 유엔 총회는 올림픽 동안 전쟁을 중지하는 휴전 결의안을 채택해 왔다. 대표 사례가 2018년 평창 올림픽 전 김연아 선수가 한국 정부를 대표해 제안했던 유엔 총회 휴전 결의안이다.

이러한 폭력과 전쟁 중단의 뜻을 담아 9월 21일 아침 유엔 본부 앞 마당 정원에 있는 평화의 종을 치는 행사에 참여한다. 여기에 항상 주 유엔 일본대사가 주빈 역할을 한다. 일본 정부가 1954년 이 종을 기증했기 때문이다. 이 종은 당시 교황을 비롯해 전 세계 어린이가 보내온 동전, 총알, 메달 등을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종 표면에는 한자로“세계절대평화만세”를 새겼다.

가톨릭교회의 세계 평화의 날은 1월 1일, 유엔 세계 평화의 날은 9월 21일이다. (이미지 출처 = (왼쪽) usccb.org, (오른쪽) en.wikipedia.org)
가톨릭교회의 세계 평화의 날은 1월 1일, 유엔 세계 평화의 날은 9월 21일이다. (이미지 출처 = (왼쪽) usccb.org, (오른쪽) en.wikipedia.org)

두 세계 평화의 날

따라서 해마다 1월과 6월 국제 사회는 두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를 접한다. 전자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후자는 전 세계 민족들의 연합(United Nations)인 유엔 헌장의 정신을 반영한다. 즉 세계 평화의 날 주제는 평화의 눈으로 본 시대의 징표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2013년 즉위한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부터 올해까지 담화문을 10번 발표했다.

2024년 제57차 평화의 날 담화 ‘인공지능과 평화’ 

담화문 대부분 주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 이슈를 현재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진단하고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올해 주제인 인공지능(AI)은 전과 결이 다르다. 

교황 담화는 인공지능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 즉 기대와 위협을 동시에 다루고 이를 긴박한 윤리 문제로 접근한다. 2015년 ‘찬미받으소서’에서 강조했던 기술 지배 패러다임의 위험을 경고한다. 특히 인간 통제를 벗어난 알고리즘이 가져올 안보와 평화 분야에 끼칠 위협에 주의를 환기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가 간 협력을 통한 국제법 제정을 촉구한다.

AI에 대한 교황의 관심 표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다양한 기회를 통해 AI에 우려를 분명히 드러냈다. 2023년 6월 유럽의회는 세계 최초로 AI를 규제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국내에서도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AI 관련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과연 이런 인공지능은 평화에 어떤 역할을 할까? 일단 사람 대신 전투에 참여하는 드론 또는 킬러로봇 또는 DMZ 지역에 묻혀 있는 대인지뢰를 제거하는 로봇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빅데이터, 딥러닝(deep learning)을 활용한 ‘지능화 전쟁’, 즉 사람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직접 수행하는 전쟁이다. 

2022년 2월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공지능의, 인공지능에 의한 AI 전쟁의 초기 버전이었다. 숱한 과학소설에 등장했던 SF 전쟁이 마침내 현실로 눈앞에 닥친 것이다. 그리고 작년 10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인공지능을 이용해 하마스를 공격했다. 두 전쟁을 계기로 참전국은 그동안 축적한 인공지능 기술력을 실전에 처음으로 사용한 셈이다. 마치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파괴의 신 시바와 전쟁의 신 인드라가 인간 세계에 등장해 전쟁을 벌이는 형국과 같다.

만약 동유럽과 중동의 불 기운이 인구가 밀집된 동아시아로 번질 경우 더 고도화된 ‘지능화 전쟁’이 가져올 파괴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악화되는 기후위기만 해도 감당하기 벅찬데, 여기에 인공지능의 위협까지 등장하면서 새해부터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인공지능과 유엔

현재 유엔에서는 인공지능 문제를 지속가능발전과 인권 그리고 안보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유엔의 다양한 환경과 지속가능발전 관련 기구는 AI를 통한 환경 문제, 특히 기후대응 방안을 논의해 왔다. 그리고 빈곤 퇴치, 농촌 개발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 이에 반해 안보, 평화와 인권 분야 논의는 다소 늦게 시작됐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와 인권 이사회는 2023년 처음으로 인공지능 문제를 공식 다루었다. 안보리에서 유엔 사무총장은 “AI가 테러에 활용될 수 없도록 유엔 산하기구를 만들어 통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제 안보 문제에서 대립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은 AI의 위협에 대해 논의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동의했지만 강조점은 달랐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해서 “AI가 검열과 통제 등 인권침해 도구로 전락할 것을 우려했다”면, 중국은 "AI가 군사 패권에 활용되는 것"을 반대했다. 러시아는 “아직 AI가 세계 안보위협 요인으로 규명이 되지 않았다”면서 시기상조론을 피력했다.1) 결국 안보리는 첫 논의에서 AI에 대한 입장 차이만 확인한 셈이다.

제네바의 유엔 인권 이사회도 2023년 처음으로 AI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안보리와 달리 처음부터 의미 있는 합의에 다다랐다. 2019년 한국 정부 주도로 처음 채택된 '신기술과 인권' 결의안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결의안은 ‘채택된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활용할 때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할 필요를 강조’하였고, 더 나아가 ‘투명성, 비차별, 인권 영향평가 등 인공지능 분야에서 인권 보호를 위한 일련의 원칙 적용의 중요성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러한 논의는 올해 9월 열릴 미래정상회의(SOTF)에서도 다루고, 최종 결과 문서인 "미래를 위한 약속"(Pack for the Future)에 담을 예정이다.

한국의 역할

한국은 AI 분야 특허 수 기준으로 세계 4위라 한다. 현재 초거대 AI를 만들 수 있는 나라로 미국, 중국, 이스라엘과 한국 네 나라를 꼽는다. 한국은 반도체 산업 역량을 토대로 AI 데이터 주권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한국은 국제 정치에서 패권 국가도 아니고 주변 국가와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지도 않다. 한국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임기 2년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역할을 시작했다. 즉 안보리의 AI 논의에 더 적극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 정부는 유엔 인권 이사회의 신기술과 인권 결의안을 주도하고 있다. 객관적 조건만으로 볼 때 한국은 AI를 국제 사회에서 평화와 인권 증진의 유용한 도구로 만드는 데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 즉 교황의 평화의 날 담화를 실천하는 데 가장 적합한 행위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적 소명에 대한 인지 능력과 의지다.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현 정부에 천주교 신자 장관이 세 명이라 한다. 이분들부터 1월이 가기 전에 교황의 평화 담화문을 꼼꼼하게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1) https://www.sedaily.com/NewsView/29S7F59R46

 

이성훈(안셀모)

아시아시민사회지속가능발전목표(SDGs) 파트너십 대표
팍스크리스티코리아(PCK) 창립 공동대표, 현 국제협력 이사
대학 가톨릭학생회 활동 경험을 계기로 홍콩, 제네바, 방콕 국제 가톨릭 및 인권NGO에서 15년 근무하는 등, 약 30년간 인권과 민주주의, 지속가능발전과 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했다. 최근에는 천주교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으로 평화와 기후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지식으로 나누기 위해 경희대, 아주대, 성공회대 대학원에서 강의도 병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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